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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고려사

[고려사] - 천리장성과 여진정벌, 아골타와 금의 등장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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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천리장성과 여진정벌, 아골타와 금의 등장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강동 6주를 완전히 영토화한 고려는 북쪽에서의 침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자 북방의 침입에 대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를 천리장성 또는 고려장성이라고 한다. 천리장성은 흥화진 압록강에서 시작해서 동해한 함주(함흥) 까지 연결되었다. 천리장성으로 불린 장성은 덕종 2년인 1033년부터 평장사 유소를 책임자로 하여 건설을 시작해 정종 10년인 1044년에 완성하였다. 이에 거란은 반발하였으나 덕종과 정종은 끝까지 밀어붙여 건설하였다.

북한에 일부 남아있는 천리장성

천리장성 동북 방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숙신과 말갈에서 내려온 생여진 계통의 종족이었다. 여진족은 지금의 한반도 함경도는 물론이고, 두만강 유역과 흑룡강, 송화강 유역에 흩어져 반농, 반목 형태의 경제를 유지했다. 대다수의 여진족은 유목생활에 더 집중했는데, 이들은 주로 두만강 유역에 거주했고,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않았다. 주변 국가들은 이들을 정복하거나 업신여겨왔다. 그러나 거란은 여진족 만명이 넘으면 대적할 수 없다면서 이들의 통일된 세력형성을 두려워하였다. 이는 반농반목이라는 경제체제에서 오는 자급력을 두려워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중 여진족 부족의 하나인 완안부가 강성해지면서 마천령 이남과 정평 이북의 여진부족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의 여진들은 일찍이 고려에 복속한 촌락들이었는데, 완안부는 고려 지배하의 여진족들을 흡수하면서 고려와의 국경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1104년 동북면행영병마사 임간을 보내 여진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여진의 선전으로 고려는 오히려 정주성을 잃었다. 이에 고려정부는 윤관을 장수로 하여 출진시켰으나 윤관 또한 이들에게 패배하고 겨우 화약만 맺는 수준이었다. 임간과 윤관은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천리장성 밖의 여진은 모두 완안부에 복속되게 되었다.

척경입비도, 고려의 북방 정벌과 9성 개척을 기념하는 비석을 선춘령에 세웠다.

임간과 윤관은 여진을 상대하기 위해 보병위주인 현재의 고려군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들은 숙종에게 건의하여 여진정벌을 위한 준비로 별무반을 편성하여 전략을 세우고 준비한다. 별무반은 여진의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을 기초로 고려는 여진 정벌의 기반을 닦았다. 고려는 예종 2년인 북방을 향해 1107년에 여진정벌을 일으켰다. 고려는 윤관을 대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하는 17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하여 동여진 정벌군을 편성했다. 고려군은 완안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여진의 135개 촌락을 점령하고 5,000여명을 포로로 잡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또한 점령 지역에 함주를 비롯해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통태진, 숭녕진, 진양진 등 9개 성을 쌓았다. 여기에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실제적 영토화를 추진했다. 남방의 6만 9천여호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금 태조 아골타, (1068년 8월 1일 ~ 1123년 9월 19일)

고려가 여진정벌을 통해 새로이 개척한 9성의 영역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9성 일대의 농경지를 잃은 여진은 계속해서 고려의 9성을 공격하였다. 물리적인 공격과는 별개로 외교적으로도 계속해서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고려는 9성지역에 대해 농경을 실시하려했으나 잦은 공격과 익숙하지 않은 풍토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여진족의 공격에 대비해 방비에 막대한 물자가 소모되는 9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주둔했던 군사와 주민들을 다시 천리장성 이남으로 복귀시켰다.

금의 건국

9성을 되찾은 이후 완안부는 걸출한 수장인 아골타가 이끌면서 세력을 통합하였다. 9성을 기반으로 여진족은 곧 만주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는 1115년에 금이라는 국호를 내세우며 황제를 칭했다. 여진족은 세력이 강성해지자 곧 고려에 형제의 맹약을 맺고자 했고, 자신들을 핍박하던 거란을 멸망시키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위시하게 되자 고려와 군신의 관계를 맺고자 했다. 고려는 논쟁 끝에 주화파가 득세하여 여진에 대해 무력 저항을 하지 않고 사대의 예로써 금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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