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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고려사

[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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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고려의 민족통일과 고려 초 정세, 발해의 멸망

경번갑의 고려군

신라가 힘을 잃은 뒤 후삼국 시대가 열리자 상황은 후백제에 비해 고려에게 우세하게 돌아갔다. 930년 고창 전투에 이어서 934년 운주전투에서 후백제군은 고려군에게 패배하면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후백제 왕실 내부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견훤이 넷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고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시에 926년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면서 고려는 발해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내부의 분열로 큰아들 신검에게 피체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결국 숙적이던 고려에 의탁하였다. 나라를 세운 견훤이 상징성이 있었던 만큼 후백제는 더욱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신라의 경순왕이 935년 10월에 고려에 복속하면서 고려는 나주를 포함해서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후백제를 포위하는 형세를 취하였다. 

 

 왕건은 후백제와 선산의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여 후백제군을 격파했다. 고려군은 황산 전투에서 승리한 뒤 완산주를 점령했다. 이로써 후백제는 견훤이 건국한지 37년만에 멸망하고, 후삼국시대는 고려에 의해 완전히 통일 되었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이 되어준 호족에게 관직을 내리거나 왕씨성을 내리면서 내실을 다졌다. 또한 유력 호족들에게는 혼인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태조는 평양을 서경으로두고 평양을 경영하여 고려왕실의 독자적 세력기반으로 육성하였다. 이는 고구려 게승의식을 나타내기도 한다.  동시에 고려왕실의 기반세력으로 타 호족세력을 견제하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발해가 거란의 의해 926년 멸망하였다. 이때 발해의 고구려계통 지배계층이 고려에 귀순해왔다. 태조는 이들을 받아들여 우대하였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 계승의식과 고려가 삼한을 통일했다는 정체성을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태조의 아들인 혜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호족연합정권에 불과했던 고려국왕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주출신 호족의 핏줄을 가진 혜종은 지지기반이 약했다. 자신의 왕위와 목숨을 노리는 적대세력의 준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불안한 날들을 보내다가 재위 2년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고려의 3대 정종은 서경을 기반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식렴의 군사력을 끌어들여서 정적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종 또한 재위 4년만에 병사했다. 고려 초기 정세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태조 이래 고려 왕실의 숙원인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화는 계속 해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정종의 동생 4대 광종은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고려 왕권의 강화를 바라는 정종의 뜻으로 왕위에 올랐다. 광종은 즉위 초 왕권강화 기반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후 재위 11년 부터 26년 까지 약 15년 동안 호족세력을 숙청하였다. 광종의 집요한 노력으로 고려는 왕권강화라는 숙원을 이룰 수 있었다. 고려 광종대에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가 시행되었고, 이는 구한말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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