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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고려사

[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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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과 북진정책, 거란과 전쟁 (1~3차 여요전쟁)

 

고려는 국호에서 보여지듯 건국 초부터 고구려를 계승을 표방했다. 이는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국조로 삼는 기반이 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중시하고, 평양을 기반으로 하여 청천강 이북으로 영토를 확대하려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북진 정책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영유하던 거란에게는 무시할수 없는 도전이었다. 두 나라의 대립은 곧 갈등으로 나타났다. 

요 태조, 아율아보기(872 - 926년 9월 6일)

거란은 스스로를 키타이라고 부르는 유목 민족이다. 거란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있었는데, 당에 복속하였다. 그러던 중 당 말기의 혼란기에 질랄부에서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리더가 나와 부족을 통일하며 거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또한 서쪽의 탕구트와 동쪽의 발해를 복속시켜 제국을 건설하였다. 거란은 중원진출을 위해 우선 후방에 위치한 발해를 공격하여 먼저 멸망시켰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에 "거란의 동쪽 영토"라는 의미의 동란국을 세웠다. 그 후 고려 태조는 망명해 오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에 강경하게 대응하려 하였다. 태조는 발해와 연대의식을 강조하며 고구려 계승의식을 부각시켰다.

당이 멸망한 뒤 5대 10국의 혼란기를 거쳐 송이 중국을 통일하고 거란과 대치하자, 고려의 광종은 송과 제휴하여 거란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거란이 잠시 만주일대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압록강 유역에서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이 송과의 연계를 통해 거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정안국은 2대 48년에 걸쳐 거란에 대항했다. 거란은 정안국을 견제하고 공격하면서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고려로 침략해 왔다. 993년 거란은 송과의 전쟁에 앞서 소손녕이 이끄는 수십만 대군을 보내어 고려를 침입했다. 첫번째 전투에서 고려는 패배를 당했다. 선봉인 윤서안이 잡혀가는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곧 안융진에서 방어에 성공하였다. 전선이 고착화 되자 양측은 협상에 나섰다. 송과의 대립으로 거란은 온전히 고려에 신경을 쓸 수 없었고, 고려의 서희는 거란군이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해 외교적 해결에 나섰다. 서희는 거란이 원하는 대로 고려는 앞으로 송과 단교하고 요(거란)와 통교할 것을 약속하면서,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이 강동 6주에 있는 여진으로 인해 요와 원활히 통교 할 수 없는 것을 요에 이야기 한 후 강동 6주의 지배권을 약속 받았다. 담판 이후 고려는 다음해 강동 6주를 공격하여 군사 요충지를 설치해 고려의 영토화를 진행했다.

서희의 담판

당시 고려는 압록강 유역이던 강동 6주에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압록강 유역에는 여진을 비롯한 일부 민족이 뒤섞여 있었기에 고려는 이곳에 대한 통제력을 완벽히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이 제기했던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요구를 차단하고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전쟁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종전의 조건이었던 송과의 단교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요와 화친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송과 비밀리에 접촉을 했고,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요는 강동 6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강동 6주를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고려에서에 일어난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침략해 왔다.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거란 성종은 고려의 현종 원년인 1010년에 보병과 기병 40만명을 이끌고 고려로 처들어 왔다. 명분은 강조의 제거였으나 앞서 말했듯 강동 6주를 회복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함이었기에 외교적 해결은 불가능했다.

 

고려는 강조의 지휘 하에 30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대응했다. 흥화진에서 벌어진 첫 전투는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의 승리로 끝났다. 거란군은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일부 병력만 남겨두고 개성을 향해 진군했다. 흥화진을 우회해 진격한 거란군은 통주에서 고려군과 조우했다. 강조는 요충지인 통주에서 거란군을 만나 분전하였지만 패배하였고 결국 거란군은 서경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거란군은 서경을 공격하면서 병력일 부만 남겨두고 다시 서경을 우회해 개경으로 내려갔다. 

현종의 피난길

거란군이 도읍인 개경을 점령하자, 현종은 멀리 나주로 피난하였다. 수도 개경은 거란의 점령에 의해 많은 전각이 불타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거란은 점령은 했으나 왕이 없는 빈 도읍을 차지함은 의미 없음을 깨닫고 다시 철군하기 시작한다. 서둘러 철군하지 않으면 고려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퇴각하던 거란군은 고려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를 비롯해 후방의 고려군이 곳곳에서 철수하는 거란군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거란군에게 사로잡힌 포롤를 구출하며 분전하였다. 

귀주대첩(이용환, 1975)

이후 거란(요)는 고려에 국왕의 친조를 요구했지만, 고려는 거부했고 다시 거란 성종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쳐들어왔다. 이번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소규모로 공격하다가 1018년 소배압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이를 2차 고려 - 거란 전쟁이라고 한다. 고려는 강감찬을 총지휘관으로 20만 병력을 전선에 투입했다. 거란은 흥화진을 공략하지 않고 우회하여 개경을 바로 공격하려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거란군이 오는 길목에 강감찬은 병력을 파견해 습격하는 한편 개경에 방위군을 늘려 수비를 강화했다. 동북면에서 온 병력 역시 가세하면서 거란군은 개경을 공격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속적으로 고려군에 의해 전력을 잃은 거란군은 개경 인근까지 접근했으나 개경 근처 금교역에서 기병 300기가 전멸당하자 철군을 결정하였다. 고려군은 철군하는 거란군을 철저하게 공격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귀주대첩으로 귀주에서 공격하여 10만명 중 살아남은 자 중 2700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강감찬(948년 - 1031년 9월 9일)

이 승리로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략할 수 없게 되었고, 고려의 배후에 송나라가 있는 한 송으로 공격도 할 수 없게 되어, 동아시아는 고려, 송, 요 3국 세력의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는 동북면의 패자이자 송 조차 어찌 할 수 없는 거란과 싸워 이긴 국가로 국제적 위상이 올라감은 물론, 송마저 고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세력의 균형 속에서 고려는 거란과 송과 활발한 교류를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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