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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고려사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용장성 전투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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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대몽항전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제주에서의 전투

 

마지막 무신정권의 권력자였던 임유무가 몽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고려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의 환도를 준비한다. 그러나 강화도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삼별초들은 몽골에게 보복 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본디 좌별초, 우별초로 구성된 야별초에 신의군이 더해져 3개의 별초로 구성된 군대로 최우 집권기에 나타나 대몽항쟁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다. 최항 집권기에 창설된 신의군은 몽골에 붙잡혔다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삼별초는 반몽적 성격이 강했으며 당시 고려의 가장 최선봉에 있는 정예부대였다. 이들의 명부가 왕에게 압수당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넘어간다면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에 1270년 6월 삼별초 수장 배중손은 환도를 거부하고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배 1,000여 척을 동원하여 강화도로 부터 탈출하였다. 1270년 8월 배중손 일행은 진도에 입성하여 일대를 평정하고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진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세곡이 조운을 통해 운반되는 곳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실제로 삼별초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개경 정부는 경제적 타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곳은 무신정권의 대규모 농장이 형성되어 있던 곳으로 삼별초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진도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삼별초는 용장성을 거점으로 삼고 제반시설과 관아를 경영하였다. 삼별초가 진도에 자리를 잡자 그 세력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 미쳤다. 고려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여몽연합군이 편성되어 진압을 시도했다. 병력은 6천, 병선은 약 400척에 가까운 수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진도 용장성 터

여몽연합군은 좌군, 우군, 중군으로 나뉘어 동쪽과 중앙, 서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고려 장수 김방경은 중군에서 삼별초의 이목을 끌었다. 삼별초가 중앙 쪽으로 몰려 방비가 약해진 틈을 타 동쪽과 서쪽에서 여몽연합군이 상륙하여 용장성의 배후와 측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공격에 성안의 지휘부는 혼란에 빠졌고, 승화후 왕온과 배중손이 사망하였다. 삼별초는 이 패배로 대부분의 인원이 포로로 잡혔고 일부 병력만 김통정의 지휘 하에 빠져나와 최후의 후방기지인 제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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