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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고려사

[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에서의 대몽 항쟁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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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에서의 대몽 항쟁

몽골 등장 직전의 동북아시아 정세

몽골이 고려에 접촉한 것은 고려가 강동성에 있는 거란의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공동작전을 펼친 때이다. 1219년 고려는 몽골 병력과 함께 거란의 병력을 공격했고, 이때부터 몽골은 만주에서 거란이 갖고있던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시에 몽골은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면서 고려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권력이 거란에서 몽골로 옮겨과는 과도기에 고려에 공물을 요구하던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변에서 살해당했다. 압록강변에는 거란의 잔당, 여진족, 고려, 몽골 등 다양한 민족이 산재하는 곳으로 어떤 세력이 저고여를 피살했는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1231년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하여 중원정벌 전에 후방을 안전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저고여가 피살은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은 약 6년만에 그 책임을 물어 처들어온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때부터 몽골은 1259년 강화할 때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서 고려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1231년 8월, 몽골의 1차 침입은 고려의 귀주와 서경, 수안을 차례로 공격하며 파죽지세로 진행되었다. 결국 11월 말에 몽골군은 개경으로 진격하였다. 고려는 귀주에서 박서를 내세워 몽골을 저지했고, 자의성에서는 최춘명이 성을 지켜냈다. 또한 충주에서는 지광수의 지휘 아래 충주성을 지켜냈다. 농민 반란을 일삼던 초적들 역시 대외적으로 몽골이 침략을 하자, 대몽항쟁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고려의 승리는 전황을 뒤집지 못했다. 결국 몽골군은 수도 개경을 포위했고, 고려 고종은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를 만나 강화를 맺었다. 이로써 1차 침략은 마무리 되었다.

강화 고려궁지

몽골의 침략을 겪은 최우정권은 개경을 지키면서 육지에서 몽골의 기마군대를 맞이해 싸우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개경과 가깝고 육지에서 떨어진 섬인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후 강화도는 40년간 고려의 전시 수도가 되었으며 몽고의 침입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지역이었다. 강화도의 임시수도는 무신정권이 붕괴되어 다시 개경으로 천도될때까지 유지 되었다. 

처인성 전투 묘사도

그러나 고려 조정의 강화천도는 다시 몽골군을 불러들이는 빌미가 되었다. 1232년 몽골은 고려조정의 개경 환도를 요구하면서 2차 침입을 시작하였다. 몽골군에게 강화도는 강을 건너야 했으므로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을 내건것이다. 고려 정부는 강화도에서 항쟁하였으나, 순식간에 서북부를 초토화 시키고 서경을 함락한 몽골군은 경상도까지 남하하며 약탈을 자행했고, 이 과정에서 부인사에 보관중이던 초조대장경이 불타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의 용인에 위치한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이를 화살로 맞추어 사살하면서 몽고군은 급히 철수 하였다. 

처인성 전투

적장 살리타가 죽으면서 급하게 철군한지 3년 뒤인 1235년, 몽골은 고려와 어떤 교섭도 없이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다. 당시 금나라가 1234년에 멸망하자 중원에서 남송을 공격하러 가던 중에, 남송과 고려가 연합할 것을 우려하여 탕우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우선적으로 고려를 공격하게 한 것이다. 3차 침입의 몽골군의 목적은 고려가 남송과 연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기에 몇 차례의 패배를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고려 영토에 머물면서 국토를 휩쓸었다.

 

1236년에 몽골군은 전주지역으로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고,  1238년에는 지금의 경주지역을 침입하여 황룡사 9층을 불태웠다. 이러한 잦은 침략에도 고려는 계속해서 대몽 항쟁을 지속했다. 고려가 입은 피해는 사실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전 국토는 이미 황폐화 되었고, 고려의 일반민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강화에서 육지를 통솔하는데 한계가 있고 몽골군의 약탈로 육지가 황폐화 되자, 고려는 강화를 제의하였다. 몽골은 고려 고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1239년 4월에 철수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강화 조정은 환도하지 않고 계속 강화에 남아있었다.

몽골군의 5차 침입로. 충주성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4~5차 침략은 몽골의 계승문제가 얽히면서 지리하게 진행되었다. 몽골의 후계분쟁이 끝나고 몽케 칸이 즉위하면서 다시 위기가 불거졌다. 그는 1253년 고려가 입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명분으로 다시 침략한다. 이때가 5차 침략이다. 고려조정은 강화도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몽골군은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9월부터 10월까지 동주,춘주,양근, 양주 등을 공격하면서 남하하였다. 이윽고 몽골군은 충주성에 도착했다. 그러나 충주성에는 처인성 전투의 김윤후가 있었고 충주성은 한달이상 시간을 끌면서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강화도와 승천부의 위치

이때 몽골 장수 예케는 고려에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회의를 주도했고, 고려 고종은 승천부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다. 충주성 전투가 70여일에 걸쳐 전선이 고착화 되자 몽골군은 불리함을 느끼고 결국 회견 이후 철수를 시작하였다. 몽골 군대는 여러차례 학습한 것처럼 고려가 다시 공격할 것을 우려해 철수를 망설였는데 고려에서 왕자 안경공 창을 몽골에 보내며 항복을 표하자 완전히 귀국하였다. 안경공 창은 1년 뒤인 1254년 고려로 귀국했다.

몽케 칸

1254년 7월 안경공 창의 왕자 자격 논란으로 몽케 칸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고려 조정이 육지로 나올 것과 실력자 최항이 입조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 역시 자랄타이를 내세운 군사적 침략이 동원되었다. 이를 6차 침략이라고 한다. 6차 침략에서 몽골군은 수군도 동원하였다. 이들은 고려 전국을 휩쓸며 남하하였다. 몇 차례의 패배는 있었지만 몽골군은 진주까지 남하하였다. 이때 고려의 피해는 막심하여 포로가 2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6차 침략 이후로 몽골군은 고려에 장기 주둔을 시작했으며, 연속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골은 끊임없이 고려 조정이 들어가 있는 강화도를 공격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1258년 최씨 일가가 무너지고, 뒤이은 권력자들도 길게 집권하지 못하다가 몽골의 군사적 원조를 받은 원종에 의해 무신 임유무가 살해되면서 결국 강화의 물꼬가 트인다. 고려에서 무신정권은 백년만에 종말을 맞이했으며, 고려와 몽골은 화해의 시대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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