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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by Timemapcatographer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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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의 대외관계와 냉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창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

스탈리의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들이 소비에트를 맡으면서 대외정책은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해졌다. 스탈린 당시의 관점인 세계가 노동자의 적으로 가득 찼다고 보는 관점은 점차 “차이점의 연속체(a continuum of difference)"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각 국가간의 사이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폭넓게 다르다는 점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일부의 차이점은 소비에트 이익에 반하지 않으면 이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느정도 인정의 한계를 지녔지만, 소비에트 블록내에서 견해의 차이를 관용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와 소비에트가 공존할 수 있고, 전쟁 없이 이 차이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미래를 제시했다. 

 

물론 핵무기가 적을 겨누고 있는 냉전시대에 데탕트, 즉 긴장완화는 아주 합리적이면서 유용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다른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자신의 영향권을 확대하고 새로운 동맹국을 얻길 원했다. 이들은 대외관계에서 집요하게 스탈린주의적 관점을 반영했고, 이러한 기조는 결국 타 국가와의 갈등을 빚곤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입장에서 새로운 동맹국이 생기는 것은 매우 환영할 일이겠지만, 그 동맹관계가 결코 평등한 것은 아니었다. 동유럽, 중국, 제 3세계 일부 국가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하위 관계에 편입되었으며 소비에트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이들을 지휘하는 자리에 있으려고 했다. 스탈린 사후에는 이러한 지배관계는 과거보다 더 세심하고 효과적으로 다루어졌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남일 북한 조선인민군 대장이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스탈린 사망 직후 말렌코프가 소비에트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국내와 국제적 긴장도 동시에 완화되는 듯 보였다. 신임 수상 말렌코프는 모든 문제는 평화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미국과의 상호 이해에 도전했다. 그 결과로 1953년 여름, 한국에서는 마침내 휴전이 합의되었고, 1954년 봄에는 국제회담이 개최되어 베트남의 북쪽은 공산주의 남쪽은 베트남 독립국의로 분할하여 전쟁이 종식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인도차이나 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 국지 전쟁을 종식시키므로써 더 큰 참화를 막았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동시에 말렌코프는 국제연합의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와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하여 국제관계의 개선과 정상회담을 언급했다. 

동베를린에서 일어난 시위에 호응하여  라이프치히에서 발발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소련군의  IS-2.

그러나 온건완화정책이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장밋빛 미래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1953년 6월 초반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시위와 파업사태가 발발하고, 필젠에서는 심각한 상태로 치달았다. 시위자들은 시청을 장악하고 자유선거를 요구했다. 6월 중순에는 동베를린과 동독의 라이프치히 등 일부 도시들에서 총파업을 선언한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소비에트를 표방한채 일어난 시위에 호응하는 세력이 늘어나면서 소비에트는 결국 군대를 투입하여 전투를 통해 이들을 진압해야만 했다. 

1955년 7월,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모스크바 휴전 협정에 따라 핀란드가 소련에 할양한 영토

 

정부수반이었던 말렌코프 다음으로 나선 불가닌은 국제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소비에트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1955년 오스트리아와의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제네바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불가닌가 아이젠하워 두 사람은 모두 자국이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했다. 소비에트는 모스크바 평화협정을 통해 할양했던 포르칼라 기지를 핀란드에 반환헀고, 핀란드와 20년 기한의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는 계속 진행되지 못하였는데, 양국의 외무장관들이 정부수상들이 표한 합의와 이해의 입장을 위해 회담을 개최했지만,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서구와 소비에트 사이의 화해는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1955년 5월 14일, 바르샤바조약기구 창설

 

세계의 양극체제는 냉전이라는 형태로 계속되었다.  인도차이나 북부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한 이후에, 양극은 서로에 대한 방어벽을 설립했다. 영국, 프랑스, 파키스탄, 태국에 미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이 모여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가 설립되었다. 소비에트도 1955년 5월 위성국들과 함께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하여 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지위권을 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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