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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사] - 전국시대를 평정한 진나라의 전국통일

by Timemapcatographer 202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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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전국시대를 평정한 진나라의 전국통일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잡기위해 전국에서 영웅이 할거하였다. 지역패권을 잡은 지역군벌들은 옆 지역의 세력을 흡수하기위해 노력했고 전국이 전쟁의 포화로 빠져들었다. 전국시대 전쟁이 계속 되면서 사회 곳곳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지역의 패자들은 지역의 재화를 모두 쏟아부어 전쟁에 나섰다. 그런만큼 많은 양의 물자가 전쟁에 소비되었다. 이러한 재화의 손실은 모두 생산계층인 농민이 부담해야했다. 또한 이전 시대에 비해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징병되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상인들 역시도 전쟁으로 상업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면서 종국에는 이렇게 계속되는 전쟁을 종식해야한다는 사회 각 계층의 생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일어난 영웅들의 세력은 결국 7개로 압축되었다. 이들을 전국 7웅이라고 부른다. 전국 7웅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국가는 진이었다. 진은 전국시대 후반 제나라의 몰락 이후에 사실상 독존적인 패권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은 그후 50년 동안 무리한 팽창을 진행하지 않고, 새로운 강국의 부상만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 주변국을 견제하였다. 이는 곧 진을 제외한 6국의 평균적 약화를 불러왔고, 6국의 연합 및 공동대응능력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결국 진은 국력을  응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부국강병책으로 확보한 국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230년에 국력이 가장 약했던 한을  공격하였다. 한에 이어서 위, 초, 연, 조가 차례로 진에게 공격당해 멸망하였고 마지막으로 기원전 221년 제나라가 멸망하면서 전국시대는 진의 통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기원전 221년에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왕은 정이었다. 13세에 즉위하여 진을 통치하였던 정은 철저한 법치주의 정책으로 38세에 통일을 달성한다. 그 후 자신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어 유일한 지배자임을 과시했다. 또한 자신이 첫번째 황제라고 하여 시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 한 후 전국에 군현을 설치하여 중앙 집권체제를 갖추었다. 이를 군현제라고하며 중앙에서 관리를 지방에 내려보내어 직접 통치하는 형태였다. 또한 각 나라별로 달랐던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여 진정한 통일제국의 기반도 닦았다. 진 제국의 실용적 법치주의는 결국 전국시대를 막내리게 하였으며, 새롭게 시작되는 진제국의 기반이 되었다.

 

통일 직후인 기원전 220년 진시황은 진의 옛 땅인 서북쪽 일대의 순행을 나선 것을 시작으로,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순행에 나섰다. 통치자가 점령지역을 순행하는 것은 지역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반란세력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기에, 막 제국을 설립한 진시황은 약 10년간 모두 다섯차례에 걸쳐 중국 전역을 순행하였다. 물론 이런 순행은 순탄치 않았다. 무력으로 합병한 여섯 나라의 땅에 황제가 직접 가는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장량같은 인물들의 습격이 있었고, 훗날 초패왕이 되는 초나라 출신 항우 역시도 이러한 진시황의 순행을 곱게 보지 않았다.

 

이러한 순행은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황제의 권위를 알리는데에 목적이 있었다. 또한 순행하며 각종 제의에 열을 올렸는데 이는 하늘에 제사의식을 함므로서 자연재해를 막고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무리한 토목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고, 만리장성을 건설하며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였다. 국가적으로 수많은 인력이 농사같은 생산활동에서 박탈되어, 토목공사에 동원되었고 이는 수많은 반발과 국력의 약화, 중앙의 통제력 약화를 가져왔다. 진나라는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통일제국을 유지했으나, 그 구심점이던 진시황이 순행 도중에 죽으면서 진이 만든 제국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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