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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사]- 진나라의 멸망, 한제국의 등장과 한무제

by Timemapcatographer 2024.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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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진나라의 멸망, 한제국의 등장과 한무제

 

진시황의 중국통일은 중국 역사에 있어 커다란 사건이었다. 하, 은, 주 시기까지는 국가는 황하 중하류에 중심지를 두고 주변에 영향력을 끼치는 정도였고,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각 제후국의 영역이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그 지역 문화와 일체화 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점에서 진시황의 중국통일은 주나라 시기의 권위회복 또는 권력승계가 아닌 새로운 시기의 도래로 봐야한다. 진 제국은 자신의 통치방식을 점령한 땅에 이식하여 통치하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제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진나라는 무리한 토목공사와 엄격한 법 집행 등에 사회불만세력이 속출하고, 내실이 다져지지 않은 채 급속한 통합을 이루었기에 사회가 위태로웠다. 진시황 사후 제국은 급속하게 무너져 내렸고, 옛 제후국의 후예들이 나타나 새롭게 패자를 가렸다. 결국 초나라의 후예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을 주축으로 하는 두 나라가 나타나 패권을 쥐기위해 경쟁하였고, 결국 한의 유방이이 새로운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

 

한나라는 한 고조 유방 이후 7대 한 무제대에 이르러 군사적 팽창을 시작한다. 한무제는 대대적인 군사행동으로 한 제국의 영역을 넓혀 명실상부한 제국적 위용을 갖추었다. 당시 한나라와 가장 큰 마찰을 빚던 나라는 흉노였다. 흉노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유목과 약탈을 하며 생활하는 민족이었는데, 진시황이 통일 이후 이들을 황하 북쪽으로 몰아냈다. 이들은 터전을 잃고 군사적으로 결집하여 진, 한나라를 약탈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이 오르도스 지역에서 향유하던 유목 경제가 진시황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이들은 세력을 결집하고 집권화된 군사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등장한 인물은 묵특 선우였다. 한 고조 유방 역시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흉노를 경계하였는데, 이때만 해도 흉노가 한나라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어 한나라는 화친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흉노는 계속해서 한나라의 변경지역을 공략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그때마다 한나라는 계속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무제가 즉위하면서 이러한 상황이 반전되었다. 한무제는 즉위와 동시에 흉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방변경에서 흉노의 침입을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며 오르도스 남쪽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고조선과 서남 방변으로의 전쟁에 집중하며 북방의 흉노전쟁도 잠시 주춤하였다. 이후 흉노의 근거지인 서역지방을 점거하기도했으나, 결국 흉노를 완전히 복속시키는데는 실패한다. 그러나 흉노의 내분으로 호한야 선우가 한에 항복하면서 한과 흉노의 전쟁도 일단락되었다. 

 

한무제의 침략전쟁은 흉노에 국한되지 않고 한나라 주변 국가들에 대해 각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남으로는 남월이 황제를 칭했고, 동쪽의 고조선도 왕을 칭하며 한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서남쪽에서는 야랑(夜郞)·전(滇) 등이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 무제는 이러한 주변국가들이 세력을 키우기 전에 선제적으로 침략하여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한 제국은 조공무역체제를 정비하여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그 대가로 주변국가에 대해 이익을 보장해주었다. 이러한 조공무역을 시행한데에는 한 제국의 황제가 조공을 받음으로써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형성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군사 행동과 같은 강압적 조치와 함께 조공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동시에 제공하여 주변국들을 한제국의 세력권 안에 두고자했다. 한 제국의 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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