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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사]- 전한의 멸망과 찬탈자 왕망, 후한의 등장

by Timemapcatographer 202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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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전한의 멸망과 찬탈자 왕망, 후한의 등장

 

한 나라는 무제 이후 한나라는 천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득세한 외척들은 결국 권력투쟁에 뛰어들어  나라를 좀먹기 시작했다. 전한 성제가 즉위한 후 황태후의 일족은 조정에서 중요 직책을 차지하였다. 전한의 혼란을 수습한 왕망도 이러한 외척 왕씨의 일원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입관하였다. 왕망은 순조롭게 승진하여 평제를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들이면서 본격적 실권장악에 착수 하였다.

 

곧 왕망은 쿠데타를 일으켜 평제를 살해하고 스스로 가황제를 칭하였다. 동시에 참위설과 천재지변을 교묘히 이용하여 한을 대신할 사람이 왕망이라는 여론을 조성하고 수차례 추대를 사양하는 과정을 거친뒤 선양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서기 8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신(新)으로 하였다. 

 

왕망은 즉위 후 대대적 개혁에 착수하였다. 전한 말기 호족이 성장하면서 토지 겸병현상이 두드러져 각종 사회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망은 유가경전에 기초한 주의 정치제도를 이상적 정치제도로 설정하고 국가 개혁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의 제도 전체를 드러내는 급진적인 개혁에 국가 행정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왔다. 또한 맹자에 나오는 이상적인 정전제도를 모델로 하여 모든 국토를 왕전으로 삼고 토지소유를 금지하는등 현실 경제와는 매우 동떨어진 정책을 시행하므로서 현실적인 생활에 큰 불편을 가져왔다. 규제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었던 호족은 물론이거니와, 원칙적으로 보호하려했던 소농들도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왕망은 유가적 지식인들의 지지와 요구에 부응하고자 정통성 확보를 우선적으로 진행하였으나, 그러한 유가의 정치체제에 집착하여 결국 무모한 정책과 제도를 남발하였다. 주나라의 제도를 이상으로 삼았으나 현실상이 결여된 정책들은 신의 경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결국 유가적 정책에 집착한 나머지 소농의 지지확보에 실패하였다. 이후 잦은 재해와 흉노와의 대외정책에도 실패하였다. 왕망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적미군과 녹림군의 봉기도 역시 진압에 실패했다. 결국 왕조 개창 15년만에 적미군이 왕망을 죽이고 신 왕조는 멸망하였다. 

 

왕망의 신이 멸망하고 이후 한나라의 후예로 신나라 말기의 혼란을 통일하고 한 왕조를 재흥시킨 유수가 나타나 후한을 성립시켰다. 유수는 전한 경제의 6대손이다. 유수는 하북지방을 기반으로 세력을 모았으며 25년 6월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후한의 광무제로 즉위한 유수는 중국 각지에서 거병한 세력들을 평정하였다. 황제로 즉위한지 12년인 36년에 촉 땅의 공손술을 평정하면서 중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였다. 후한의 첫번째 수도는 낙양이었으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초의 삶을 살피는데 주력했다. 사후 시호로 광무황제로 추존되었다. 광무는 한 왕조를 중흥시켰다는 뜻에서 빛 광을 사용하고 화란을 평정하였다는데서 힘쓸 무를 사용하였다. 

 

그후 약 2,000년 이후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 역시 광무를 연호로 사용하면서 광무황제처럼 조선을 부흥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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