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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30

[러시아사] -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라스푸틴과 1917 러시아 혁명 [러시아사] - 제 1차세계대전과 러시아, 라스푸틴과 1917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대전은 장기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군사충돌로, 유럽의 사회 경제뿐 아니라 그간 축적된 기술과 기계화 된 군사력, 인력이 맞붙어 충돌한 전례없는 전쟁이었다. 전화의 소용돌이는 유럽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러시아는 물론 어느 국가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폭력이 그들을 감싸나갔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러시아 내부의 항의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대중의 적대감은 그들의 적인 외부를 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애국주의적, 민족적 단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차르정부에대한 충성심으로 환원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전에 있었던 국민을 정부의 소모품으로 여기는 차르정부의 태도와 더 이상 이를 좌시하지 않는.. 2022. 12. 1.
[러시아사] - 니콜라이 2세 치하 러시아의 외교 (1905 -1914) [러시아사] - 니콜라이 2세 치하 러시아의 외교 (1905 -1914)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다른 유럽열강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세계대전에 얽혀들어갔다. 차르정부는 1914년 여름 세르비아를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세계대전의 한 축이 되었다. 사실 러일전쟁에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독일과 러시아는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게다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단교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진 상태였다. 여기에 영국과 러시아의 협상이 성립되었다. 1907년 8월 31일에 조인된 영국과 러시아의 합의는 러시아 외교정책에 있어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양국은 전통적으로 극단으로 치달았던 전력을 갖고있었으나 이 합의를 통해 상호 우호적인 상태를 유지시킬 .. 2022. 11. 30.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크림전쟁의 패배 이후 러시아의 개혁에 착수했던 알렉산드르 2세는 때때로 그 개혁에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계속해서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개혁이 모두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는 의회를 개설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기구를 개설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공화주의자(나로드니키) 인민의 의지당이 계획한 폭탄 테러에 맞닥뜨리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첫번째로 투척된 폭탄은 호위병과 마부에게만 손상을 입혔다. 황제의 마차는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마차였기에 첫번째 폭탄에 의해 황제가 입은 피해는 전무했다. 그러나 상황을 살펴보고 다친 .. 2022. 9. 4.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와 러시아의 아시아 지역 팽창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와 러시아의 아시아 지역 팽창 러시아 제국은 알렉산드르 2세의 통치기에 아시아로의 진출을 황장하여 진정한 식민지 강국으로 변모했다. 그전에도 이미 폴란드와 코사크 인 등 다양한 다민족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확대를 통해 더욱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다른 유럽 열강들은 러시아의 영토팽창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는 곳은 아시아로 캅카스, 중앙아시아, 극동 지역이였기에 열강은 효과적으로 그 팽창을 저지 할 수 는 없었다. 또한 차르 정부는 알래스카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이는 1867년에 미국에 720만 달러에 팔아 넘겼다. - 카프카스 지역과 러시아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조지아(그루지야)가 러시아에 종속되고, 페르시아와 투르크로부.. 2022. 8. 27.
[중앙아시아사] - 청과 러시아의 국경분쟁과 시베리아 진출 몽골 울루스의 킵차크 칸국이자 주치 울루스의 속령에 속해있던 모스크바 공국은 이른바 "타타르의 멍에"로 불리우는 피지배 상황에서 오랜시간 몽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몽골이 쇠퇴하고 러시아의 쿨리코보 전투 이후 점차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러시아는 16세기 중반 볼가강 유역의 킵차크 칸국의 군소정권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공격해 동쪽 방면으로의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1582년 예르막이 코사크인 800명과 우랄 산맥 부근의 시비르 강을 건너면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이 시작된다. 시베리아라는 지명 역시킵자크 칸국의 후예국인 시비르 강 유역의 시비르 칸국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는 이때부터 시비르 칸국을 공격하면서 약 70년에 걸쳐서 동쪽으로 진출했다. 1586년 모스크바 공국은 튜멘.. 2022. 8. 16.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와 러시아의 농노제 개혁 [러시아사] - 알렉산드르 2세의 등장과 러시아의 농노제 개혁 (1855-1881)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했던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는 1853년 발발한 크림 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다. 러시아의 지나칠 정도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억압과 팽창주의 확장이 오히려 유럽 국가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러시아가 유럽에서 고립당하게 된 것이다. 니콜라이 1세는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참패를 당하기 시작하자, 군사적 정치적 타격을 입은 채 실의에 빠졌다. 그는 비가 오는 날 크림반도로 출진하는 군대를 사열하다가 폐렴으로 쓰러져 1855년 생을 마감했다. 크림전쟁은 1856년 끝났다. 알렉산드르 1세는 37세의 나이에 부친인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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