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사회적으로 누적되어 온 모순에 휩싸여 있었다. 이를 개혁으로 바로잡고자 했지만 고려 국왕이 자신의 위치에서 개혁을 통해 사회와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원이 압력을 행사하여 그 노력을 무위로 되돌렸다. 충자로 시작하던 고려의 국왕들 다음 즉위한 공민왕은 원이 고려의 국정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정치개혁을 서둘렀다. 공민왕은 자주성을 회복하고 권문세족을 위시한 부원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본격적인 반원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원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몽골이 약해진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14세기에 들어서며 마니불교에 심취한 원이 국력이 쇠약해지고 한족들이 원에 대해 저항을 시작하면서 원은 내부적 사정으로 인해 고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대륙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공민왕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몽골식 풍속인 변발을 없애고 호복을 벗으면서 원의 간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반원정책을 펼쳤다. 1351년 즉위한 공민왕이 1352년 호복을 벗으므로써 몽고에 대한 반원 정책을 폈다는 것은 즉위 전부터 원의 간섭을 벗어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민왕의 적극적인 반원정책은 즉위 5년인 1356년 진행되었다. 부원세력의 대표자인 기철을 비롯한 권겸, 노책 등을 처헝하고 부원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했다. 뒤이어서 원의 직할지가 되어서 1248년 이후 고려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공격했다. 1356년 시행된 공격으로 약 100년 가까이 빼앗겼던 동북방면의 땅을 수복한 것이다. 이때부터 고려는 정주 이남에서 벗어나 마천령 이북까지 진출하였다. 원은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에 사신을 보내 항의하기는 했으나 혼란스러운 국내 사정으로 인해 직접적인 개입은 할 수 없었다.
공민왕은 원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추진하려하였으나 대외적인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선 북쪽에서는 원에 대항해 일어난 홍건적이 원과 대립하다가 일부 세력이 고려로 침입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왜구가 자주 침범하여 해안선 주변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들을 격퇴하며 무장세력인 최영장군과 이성계가 주목받기도 했다. 이에 공민왕은 원에 대해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반원정책을 일시적으로 후퇴시키며 홍건적과 왜구를 상대했다.
상황이 안정되면서 공민왕은 신돈을 중용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왕권을 강화하며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성균관을 설립하며 신진사대부를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1370년에는 이성계와 지용수를 보내 요양과 선양을 공격하고 그곳에 살던 고려인들을 대거 본국으로 귀환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20년 신돈이 반대세력의 공격을 받아 실각하고 난 뒤 공민왕의 개혁은 추진력을 잃었다. 아내이던 노국대장 공주가 죽으면서 공민왕은 국정개혁의 의지조차 잃어버렸고 공민왕은 국내외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환관인 최만생에게 1374년 9월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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