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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사

[조선사]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와 조선의 시련

by Timemapcatographer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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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만주족의 흥기와 조선의 시련

만주족 팔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과 명이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붓는 사이 만주에 위치한 여진족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본디 만주지역은 명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명은 산해관 너머 여진에 대한 통제를 풀 수 밖에 없었고, 조선 역시도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내부수습이 급해 여진족에 신경쓸 수 없었다. 건주여진의 추장인 누르하치가 여진 세력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후금을 건국했다.

천명제 청 태조 누르하치,  1559년 2월 21일 ~ 1626년 9월 30일

후금은 1115년에 있었던 완안부 아골타의 금나라의 후계를 잇는 다는 명분으로 붙인 국호였다. 명은 후금이 건국되자 즉시 견제를 시작하였다. 만주로 병력을 출병시켰고 여진족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인 조선에게도 출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의 임금 광해군은 상황이 명에게 불리한 것을 깨닫고, 출정군 책임자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후금과의 전투를 하지 말고 후금과 휴전할 것을 명했다. 이러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빛을 발해 광해군이 재임하던 동안 후금과 조선은 갈등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배금이자 친명정책으로 돌아서게 되었으며 후금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중원으로 나아가려는 후금에게 조선의 존재는 불안함의 극치였다.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위해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게된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후금은 인조 5년인 1627년에 장차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배후의 안정과 물자확보를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의 명분은 광해군의 보복을 위한다는 명분과 가도의 모문룡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모문룡은 명에서 파견한 장수로 압록강 가도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후금군은 선천을 거쳐서 안주방면으로 한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서 남하하였고, 병력 일부는 압록강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모문룡의 부대를 공격했다. 

후금군이 전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면서 정묘호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1627년 1월 심양을 출발한 후금군은 1월 14일에 의주를 함락했다. 후금군이 기동력을 살려 빠르게 남하하자 인조는 소현세자는 전주로, 자신은 강화로 피난하였다. 평안도에서는 후금군이 지나가자 정봉수와 이립 등이 의병을 일으켜 후금의 배후를 공격하자 이들은 배후가 차단될 것을 염려하여 평산에서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 조정도 후금군의 강화도 접근에 위협을 느껴 주화론을 채택하고 양측 모두 협상에 들어갔다.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후금은 군대를 철군하였다. 그러나 후금은 조선에게 군신의 예를 요구했고, 공물과 정병 3만을 요구했다. 이러한 후금의 요구로 인해 조선에서는 척화배금의 여론이 일어났다. 

삼전도의 굴욕과 인조

자신들의 요구가 묵살되자 1636년  청 태종 홍타이지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이들은 불과 10여일만에 한양에 이르렀고 인조는 급하게 몽진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강화도로 가려 하였으나 청군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남한산성에는 군사 1만 3천여명과 50일치 식량밖에 없었기에 상황이 열악하였다. 청 태종은 20만 대군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하삼도에서 올라오는 조선의 병력을 공격하였다. 인조는 약 한달 반 정도를 버티다가 세자가 피난한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점령되자 곧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인조는 청 태조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고 조선과 청은 군신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만주족 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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