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초기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명은 원을 중원에서 몰아냈지만, 여전히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고, 북원은 몽골 초원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피폐해진 군사력을 재건하여 수많은 침략으로 무너진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다행히 원과 명의 갈등으로 조선 북쪽의 땅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기에 조선은 이 땅의 여진족을 회유 또는 공격하였다.
조선은 북쪽으로는 4군과 6진을 개척하였다. 국경선이 강을 기준으로 할때 외적의 침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기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의 경계로 삼고자 북진해 요새이자 근거지를 조성한 것이다. 조선 태조인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으로 고려말부터 동북면의 여진족을 평정하여 두만강 하류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태종 집권 이후 조사의의 난 때 동북지방의 여진족이 난에 가담하면서 조선과 여진의 사이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태종 대에는 여진이 계속해서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태종은 1410년 함경도의 모란위 여진을 정벌하고 160여명의 여진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로도 몇번의 정벌과 여진족의 약탈이 되풀이 되었다. 세종대에도 여진 정벌은 계속되었다. 여진족 건주위 여진 추장 이만주는 조선군의 목표가 되었다. 여진의 약탈로 1437년 조직된 토벌군은 이만주를 체포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여진 세력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세종은 평안도에 국경 방어대책을 구상했고, 국경방어의 전초 기지로 4군을 설치했다. 또한 함경도에도 방어기지를 설치하였다. 세종 16년인 1434부터 10년에 걸쳐서 김종서 등이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경원, 종성, 회령, 경흥, 온성, 부령 등에 6진을 설치했다.
조선의 북방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해 땅을 확보한 뒤 진을 설치해 수비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하면서 땅을 점령해 나갔다. 사람이 살아야만 토착민이 자신의 지역을 방어할 수 있기에 적극적으로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세종 대에는 6진 개척을 위해 함경도 내에서 5518호를, 하삼도에서 유리하던 유리민 1122호를 옮겨 살게 했고, 4군에는 평안도 1925호, 하삼도 민호 3000여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북방으로 옮긴 하삼도 출신의 백성은 5000호가 넘었다.
또한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구 또한 조선에게 실질적 위협이였다. 세종은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를 정벌해 남쪽 해안을 편안하게하였다. 1419년에는 이종무를 필두로 쓰시마를 공격하였는데, 전함 227척을 동원한 대규모 정벌군이었다. 선발대와 본대는 하루 뒤에 쓰시마의 천모만으로 진입하여 전투를 벌였고 적선 100여척을 태우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어 6월 26일 쓰시마 도주의 항복으로 조선군은 철수한다. 약 2주간의 쓰시마 정벌로 남해안의 왜구는 잠잠해졌다. 이후 100년간 왜구는 조선의 남해를 위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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