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대한제국의 성립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두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일어난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1894년 조선에서 갑오개혁을 시행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에 의해 정권에서 물러난 명성왕후는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를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가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반발하여 명성왕후를 암살할 계획을 꾸민다.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정부세력이 아닌 지금의 폭력배에 해당하는 낭인들을 동원하여 밤에 경복궁으로 침입, 명성왕후를 시해한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일왕의 결재가 한 보고서가 2005년에 발견되기도 하였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종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일본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조선 내에서 일본에 대항할 유일한 세력인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대피한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러시아를 당시 아라사라 불렀는데, 아관파천의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뜻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무는 동안, 이를 비판하는 국내의 세력이 많아졌다. 어찌 일국의 군주가 어떻게 자리를 비우고 러시아의 그늘에 숨어들었냐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관 파천 당시 고종은 일본에 의해 좌지우지 되던 조선의 조정과 군주권을 회복하는 시간으로 사용하였다. 친일적 인사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 군주권을 회복하였고, 고종은 1년만에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고 왕을 황제로 격을 높여 불렀다. 그리고 지금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원구단에서 황제 자리에 올라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선언했다. 개화파 일부는 군주권 강화를 위해 광무개혁이라는 일련의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식민지 없는 제국, 대한제국의 탄생이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진행한 광무개혁은 옛 것을 고쳐 새로이 한다는 구본신참 정신아래 진행되었다. 후한의 광무제를 본받아 조선을 중흥으로 이끌겠다는 결심을 담은 개혁이었다. 고종이 진행한 개혁은 양반이나 유생, 지주 같은 구 봉건제도 아래에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우려하여 온건적인 개혁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동시에 개혁방향은 군주권 강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우선 지금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대한제국 황제에게 군대 통수권과 입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 조약 체결권 등 정부의 주요 권리를 부여하였고, 이와 함께 사회 경제적 권한을 부여하였다. 동시에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배부하면서 민생 안정과 국가재정 확보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도량형제도를 실시하고, 우편과 전보망을 전국적으로 확충하고,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외국 자본을 통해서 근대산업의 육성을 꾀하고, 기술학교를 세우는 등 근대국가 건설에 부족함이 없을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기존의 관리와 지주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진행된 소극적인 개혁이었기 때문에 농민층의 토지분와 같은 요구는 반영되지 못했으며, 추진된 개혁도 추가적인 유지 정책이 뒷바침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회성 정책에 그쳤다. 재정적 뒷바침 없이는 개혁이 진행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산하지 못했기에 개혁이 유지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외국자본을 끌어들였던 산업정책 역시 결국 국내 경제를 외국에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여 더 큰 어려움이 직면하였다. 철도의 부설 같은 국가 기간산업을 외국인에게 특허한 점이 바로 그러했다.
민간에서도 개혁정책이 일어났다. 개화파 인사들은 정부 내 일부 관료들과 함께 계몽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청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주국으로 당당히 서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중국 사신이 지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현재의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은 당시 영은문을 허물고 지어진 독립문이다. 또한 그들은 아관파천 당시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고종의 환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들은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대중 계몽운동을 벌였는데, 의회 설립과 사법제도의 근대 개혁을 주창하고 산업의 육성을 주장했다.
독립협회는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라는 대중 집회를 개최하였다. 많은 사람이 만민공동회에 입회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이야기 하였다. 당시 장소는 현재의 종로 1~3가에 해당한다.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반외세 주권운동과 일본자본 유입을 철폐시키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보고 의회 설립과 사법제도, 재정 개혁 등에 합의 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농민운동과도 결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고, 의회 설립등의 주장이 공화정으로 나아간다고 판단하고 이들이 대한제국 황제권에 위협을 가한하여 황국협회를 동원해 이들을 해산시켰다. 고종은 독립협회를 영구 불법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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