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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

[유럽사] - 17 ~ 18세기 유럽의 근대문화 태동과 과학혁명

by Timemapcatographer 2023.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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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 - 17 ~ 18세기 유럽의 근대문화 태동과 과학혁명

바로크 문화의 결정체, 베르사유 궁전

17세기는 근대국가뿐 아니라 근대적 학문으로서 과학과 철학이 형성된 시기였다. 종교에 귀의해 만들어가던 인간의 문화는 인간 스스로 본연의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최전선에는 바로크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본디 17세기 건축양식을 가르키는 말이다. 장대함, 웅장함, 복잡하고 뛰어난 기교를 특징으로 한다. 바로크 양식은 비단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 시대의 회화, 음악 등 전반적인 예술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대표적인 건축물인 베르사유 궁전을 보면 기본적으로 질서와 안정을 나타내고 있으나 때때로 괴기하거나 격렬한 회화가 있어 불안정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 (좌),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1606년 7월 15일 ~ 1669년 10월 4일) (우)

회화에서도 바로크 사조가 엿보인다. 회화에서 바로크는 빛과 음영의 대조와 단계적 색조의 결합을 강조한다. 플랑드르의 루벤스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가 대표적인 화가이다.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좌상), 안토니오 비발디(우상),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좌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우하)

바로크 음악도 근대적 음악사를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이탈리아의 프레스코발디에서 시작된 사조는 스카를라티 부자와 비발디로 이어졌고, 바하와 헨델에 이르러 웅장한 바로크 음악은 절정에 달한다. 또 바로크 음악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등장했다. 노래와 연극이 합쳐진 오페라가 이때 등장한다. 베네치아의 몬테베르디가 시작한 오페라는 큰 인기를 얻으며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요제프 하이든(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우)

18세기로 진입하면서 웅장하던 바로크 양식은 우아하고 섬세한 로코코 양식으로 변화한다. 음악에서는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이름을 남겼고,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고전음악 확립에 방점을 찍었다.

 

문학에서도 바로크 양식이 나타난다. 17세기 프랑스 문학은 고전주의로 대변되는데, 이는 절도와 기율, 과거에 현재로 계승된 규범, 품위와 세련의 존중을 의미한다. 비단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의 17세기 문학은 총체적으로 힘차고 격렬하며 역동감이 넘치는 바로크 정신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코르네유와 라신이 대표적이다. 

존 밀턴 (좌), < 실락원  Paradise Lost, 1667> (우)

영국에서는 밀턴이 대표적이다. 그의 장엄한 작품 실락원에서 사탄은 바로크적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이 시기를 거쳐 영어는 세련되고 단순화하는 작업을 거쳐 현대 영어로 도달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크로프쉬톡과 레싱에 의해 독일국민문학이 탄생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18세기 말 괴테가와 실러가 독일 문학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이들은 고전주의 형식이나 합리주의를 벗어나 정열적인 개성의 해방을 구가하는 문학발전을 이끌었다. 괴테의 대표작으로는 파우스트가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좌), 에반젤리스타 토니첼리 (중), 블레즈 파스칼 (우)

 

문화적 부흥과 동시에 유럽 도처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근대과학은 르네상스 태동기에 싹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는 과학의 발전을 촉진할 기구와 수단이 발달했다.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은 중세로 부터 전해져온 연역법을 배격하고, 구체적 사실과 많은 자료의 측정을 권장하고 일반적 법칙을 도출하는 귀납법을 강조하였다.

 

도구의 발달도 눈부셨다. 네덜란드에서는 렌즈가 발명되었고, 갈릴레이는 이를 활용하여 현미경을 만들었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고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는 말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렸다. 이탈리아의 토리첼리는 기압계를, 프랑스의 파스칼은 기압계를 이용해 진공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동시에 수학계에서는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해석 기하학을 선보였고, 영국의 뉴턴과 독일의 라이프니치가 발명한 미적분은 천문학과 물리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과학계의 발전은 학회의 설립과 확장에 당위성을 심어주었다. 영국에서는 왕립협회와 과학 아카데미가 조직되었다. 

 요하네스 케플러 (좌) , 아이작 뉴턴 (우)

과학자들의 상호 연관관계를 통해 새로운 발견이 계속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은 케플러와 갈릴레이에게 계승되며 그들의 업적을 기반으로 영국의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주장했다. 상호간의 중력에 의해 태양과 유선이 움직이고 있다는 그의 발견은 대학시절에 부분적으로 발견한 것이나, 공식화하여 발표한 것은 1687년의 일이다. 또한 갈릴레이의 업적을 통해 운동법칙을 공식화하고 태양광선을 프리즘으로 세분화하여 광학발전에 공헌하였다. 

 

17세기는 천재의 세기였고 과학혁명이 이루어졌으나, 동시에 중세의 마녀사냥이 도처에서 성행하기도 하였다. 이는 인간의 삶속에 깊게 뿌리박힌 종교적 편견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과학혁명으로 인간은 미신과 종교의 굴레를 벗고 계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우주와 자연의 비규칙성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우주와 자연을 정복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자연과학과 산업기술의 발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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