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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 - 3·1 운동의 배경과 과정, 결과

by Timemapcatographer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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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 3·1 운동의 배경과 과정, 결과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어난 거국적,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에서 계층을 불문하고 전개된 3·1운동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일대의 사건이었다. 3·1운동을 통해 대한의 정신과 독립에 대한 의지가 살아있음을 만방에 떨쳐보였고, 그 결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일제에게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 방법을 바꾸게 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1. 3·1운동의 배경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 이후 한국의 의병과 열사들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무단통치를 표방하면서 민족적 탄압을 가했고, 점차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이 힘들어졌다. 대한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국외에 거점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또는 국내에 남아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지하에서 때를 기다렸다. 여기에는 종교, 경제단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 국민이 독립을 열망하는 가운데 1917년 상해에서 대동단결 선언이 발표되었다. 

대동단결 선언과 신규식

2. 대동단결 선언의 발표

1917년 상해에서 신규식을 필두로 박은식, 신채호, 박용만, 윤세복, 조소앙, 신석우, 한진교 등 14명의 발기인이 대동단결 선언에 서명하였다. 대동단결 선언은 1910년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하였으므로 그 주권은 국민에게 양여되었다고 본다. 국민주권설을 주장하면서 일제가 국토를 강점하고 있으니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주권을 행사하여 해외동포가 민족대회의를 개최, 대한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선언이었다. 대동단결 선언은 당장 임시정부를 설립하지는 못하였지만, 1917년까지 다양하게 난립하던 독립운동의 이론과 노선을 결집하였고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모체가 되었다. 나날이 높아져가는 일제 통치에 대한 불만과 독립의 열망이 선언의 형태로 터져나왔다.


3. 무오 독립선언서의 발표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국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39명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선언서는 무오년에 이루어졌다고 하여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린다. 1919년 기미년에 발표될 기미독립선언에 앞선 최초의 독립선언이다. 이 선언은 연해주를 비롯한 국외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모은 선언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본과 결사항전을 할 것을 선언했다. 대동단결 선언에 이어 무오독립선언에 이르러서는 연서자들이 중심이 되어 선언에서 그치지 않고, 노령에서 대한국민회의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성의 한성임시정부 등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구체적 임시정부 설립행동으로 나타났다는데에 그 의미가 있다. 


기미독립선언서

4. 1919년 고종의 승하와 기미독립선언서 발표

 1919년 들어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국내에서 고종이 승하하였다. 당시 고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는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데 일조하였다. 일제의 부당한 대한제국 점령과 폭력통치에 많은 반감을 품고있던 민중은 만세시위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종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하였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인사가 모여 민족대표를 구성하였다. 천도교 대표인 손병희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최남선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기초되었다.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인 3월 1일 경성부 태화관에 민족대표자 33인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오후 2시 태화관과 약 300미터 떨어진 탑골공원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없었지만 오후 3시경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의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한위건 등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자 뒤이어 수많은 만세가 울려퍼졌다.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던 수많은 민중이 이 만세행렬에 참여하여 그 수는 수십만에 이르렀다. 행렬이 성안을 돌고 다시 종로로 돌아와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은 칼을 휘드르며 해산시키려하였으나, 군중은 이에 버티다가 오후 6시경에 자진해산하였다. 일제는 만세행렬에 참여한 사람을 색출하고 투옥하였는데 그 수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5. 국내와 국외로 퍼져나간 만세시위

 서울에서 일어난 시위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기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이나 근거지에서 새로운 만세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전국으로 만세시위가 빠르게 퍼져나가자 일제는 진압은 커녕 군대를 동원해 이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항한 민중의 항쟁으로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져나갔다. 

 

3월 1일 당일 3·1운동의 최초 사망자가 평안북도 선천과 안주에서 나타났다. 일제 경찰은 평화적 만세시위를 진행하는 민중에게 발포했고 희생자가 나왔다. 또다른 희생자는 평안남도에서 나왔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지 3일 후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장에서 만세시위가 나타났다. 약 3천여명의 민중은 대둥군 원장리에서 강서군 사천시장 방면으로 행진하였는데, 사천헌병주재소의 사토지쓰고로와 헌병보조원들이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수십명의 사상자가 났으며 조선인 출신 헌병보조원들도 시위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3월 28일에는 경상남도 창원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있었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여한 변상태가 진전면, 진북면, 진동면의 3개면에서 인사를 모아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약 3천여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헌병대와 충돌하였고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당하였다.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4월 1일 천안 병천시장의 3천여 군중이 만세를 불렀다. 이때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과 투옥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국외에서도 만세 행렬은 이어졌다. 북간도 용정에서는 3월 13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만여명의 군중이 참여한 시위였다. 원래 시위는 용정시내에서 열릴 계획이었으나 일제 영사관의 반대로 중국 당국은 시위를 불허했다. 하여 용정 근처 서전대야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계기로 북간도에서 독립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구춘선을 회장으로 하는 대한국민회의 모체가 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비폭령 평화만세운동에 대해 폭력적 탄압을 시도하였다. 거기에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학살을 자행하였다. 경기도 수원에서 있었던 교회에 수십명을 몰아넣고 불을 지른 제암리 학살사건, 쇠갈고리로 시위대를 참살한 곽산 학살사건, 시위군중에 무차별 총질을 하다가 결국 헌병마저 맞아 죽고 만 사천 학살사건, 마을 주민 수십명을 학살한 화수리 학살사건, 헌병소 안마당에서 천도교와 기독교인을 가둔 뒤 총살한 맹산 학살 사건 등 수없이 학살이 자행되었다. 

 


일본의 지배로부터

6. 3·1운동의 의미와 유산

3·1 운동의 결과 한국인들은 민족의식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독립을 향한 민족적 열망을 확인 할 수 있었고,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결실로 맺어냈다. 해외에서도 한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관심있게 지켜보았고, 독립 선언 자체를 가치있는 행동으로 보았다.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만세운동의 모든 과정을 기록하고 국외에 알리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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