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 - 1920년대 민족운동: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가 진행되면서 국내에서는 민족교육의 열기와 그에 따른 민족적 고양감이 고취되기 시작하였다. 고종이 승하할 때 일어났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민족운동의 열기가 뜨겁게 이어지던 때 승하한 순종황제로 인해 다시 만세운동의 열기가 분출되었다.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가 서거하자 국내의 청년들이 모여 새로운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시위준비를 시작했다.
순종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 행렬이 다가왔고, 당일 창덕궁에서 종로를 지나 동대문에 이르는 길에 수많은 애도 인파로 가득 찼다. 연희전문, 중앙고보, 경성대학 등의 학생 조직과 천도교에서 동원된 청년들은 인산 행렬이 지나가는 도중에 길목마다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부르면서 가두시위를 펼쳤다.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 때의 학습된 경험과 국내 학생단체의 활동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만세운동세력을 제압했다. 6.10만세운동으로 인해서 국내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세력은 타격을 받고 2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6.10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은 1920년대 사건 중 하나인 광주학생운동은 또 다른 학생운동의 시작이었다. 1929년 1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 광주학생운동은 나주에서 광주를 오가는 통학 열차안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생겨났다. 당시 열차안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이에 한국인 남학생들이 항의하며 충돌이 일어났다. 학생들간의 충돌로 인해 경찰이 출동하였고, 경찰은 일본인만을 두둔하였다. 상황이 한국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이는 학생들간의 마찰이 아닌 민족적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곧 학생운동 조직이 생겨났고 결국 대규모 항일학생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광주항일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해결책 뿐만 아니라 식민지교육 철폐와 일제 타도, 민족해방을 주장하며 동맹 휴학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학생 운동 조직을 기반으로 운동을 벌였으며 광주항일학생운동은 이후 몇개월 동안 전국 여러 곳의 항일학생 시위로 확산되었다.
또한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통합하려는 민족유일당 운동도 있었다. 이 역시도 6.10만세운동의 영향이었는데, 그 결과로 1927년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신간회는 본디 신한회로 이름을 지었으나 일본이 이를 허가해주지 않자 이름을 신간회로 고쳐서 제출하였다.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에 조사원을 파견하는 등 국내 운동의 대표적 성격을 띄었으나 일제의 방해와 탄압속에서 큰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내부의 의견충돌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인해 해소의 형태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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