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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일본사] - 러일 전쟁과 조선의 병합

by Timemapcatographer 2025.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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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과 조선의 병합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확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청일 전쟁(1894-1895)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동시에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러시아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러일 전쟁(1904-1905)**으로 이어졌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결국 1910년 대한제국의 강제 병합으로 이어지게 된다.

러일 전쟁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말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팽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청일 전쟁(1894-1895) 이후 조선과 만주 지역에서의 지배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반도를 할양받으려 했던 일본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이를 반환해야 했다. 이후 러시아는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일본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였고,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 없이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며 러일 전쟁을 발발시켰다.

전쟁은 일본의 해상 우세로 전개되었다. 뤼순항 해전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봉쇄한 데 이어, 봉천 전투와 쓰시마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쓰시마 해전에서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해군이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전쟁의 향방을 일본의 승리로 이끌었다. 러시아는 1905년 국내 혁명(1905년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결국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남만주 철도와 요동반도의 조차권을 일본에 양도하였으며,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할양하였다.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본격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초대 통감으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였고,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1907년,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열강의 외면을 받으면서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늑약(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장악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무력 저항을 봉쇄하면서 식민지 지배의 수순을 밟았다.

결국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하고,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실시하여 대규모 토지 수탈을 감행하였고, 한국인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는 등 전방위적인 식민 통치를 강화하였다. 이 같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조선 민중은 을사늑약 이후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고, 1919년 3.1운동을 통해 독립을 외치며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였다. 해외에서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고 국제사회에 일본의 부당한 식민 지배를 알렸다.

 

러일 전쟁과 조선의 병합 과정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동아시아 지배를 위한 침략의 일환이었다.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민족의 자주권을 억압하고, 경제적 착취와 문화적 말살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조선의 민족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3.1운동과 의열단, 광복군과 같은 항일운동의 기반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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