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적인 접촉은 1550년대 말 영국 상인 젠킨스에 의해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영국은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교류를 이어나갔는데 이러한 연유로 영국의 젠킨스는 러시아의 차르 이반 4세의 친서를 가지고 남쪽에 위치한 히바 칸국과 부하라 칸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는 중소 칸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젠킨스의 방문 이후 16세기말 까지 공식적인 사신교환은 물론 러시아와의 교역량도 꾸준하게 증가하였다. 이후 1600년대 들어서도 이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서 교류를 계속 유지하였다.
1700년대 들어서 러시아는 스웨덴과 대북방전쟁을 진행하며 어마어마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그중 러시아표트르 대제에 들어간 소문들 중 하나는 중앙아시아에서 황금이 나온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에 대한 진상을 찾아 표트르 대제는 황금을 통해 전쟁자금을 대기 위해서 탐사대를 보냈으나 몇번의 탐사에도 중앙아시에서 황금을 찾지는 못했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1717년 히바 칸국으로의 원정을 단행하나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1716년 부터 중앙아시아의 카자흐 칸국에서 일어난 대기근과 이로인한 지배층의 내분 등으로 러시아와의 관계는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카자흐 지배층의 일부는 러시아의 차르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뒤이어 1731년에는 키시 주즈와 오르타 주즈가, 1734년부터 37년 사이에는 울루 주즈가 러시아 차르의 신하가 되겠다며 복속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는 가혹했다. 이에 대한 불만은 곧 카자흐 지방에서의 잦은 반란으로 나타났다. 이에 러시아는 1820년대 이르러 오르타 주즈와 키시주즈의 칸을 폐지해버리고 부케이 주즈의 칸도 폐지하여 버린다. 이러한 러시아의 가혹한 정책과 제국주의적 팽창에 반발하는 중앙아시아의 칸국들도 러시아 상단을 약탈하고 카자흐 인들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히바 칸국을 응징하기 위해서 1839년 원정군을 보냈으나 표트르 대제 때와 같이 무참히 괴멸되었다. 그러나 카자흐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해서 남진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
러시아 남진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은 1853년 7월 러시아의 페트로프스키가 시르다리야 중류의 조그만 성채인 악크 마스지드를 점령한 사건이었다. 이곳은 현재 카자흐스탄의 키질 오르다 지역인데 러시아는 코간드 칸국과 히바 칸국이 카자흐인들을 지원하여서 러시아에 적대적인 행동을 했다는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남진을 시작했다.
그후 1858년 부터 1864년까지 코칸드 칸국을 압박하여 남진하여 내려왔다. 64년 현재의 타라즈인 아울리에 아타를 점령하고 침켄트를 점령하면서 코칸드의 턱밑까지 병력을 배치하였고 곧이어 1865년 군부의 주장에 따라 체르냐에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타쉬켄트를 함락하여 코칸드 칸국을 멸망시켰다. 타쉬켄트 공략전은 약 40일간 진행되었고 이 공략전이 진행되는 동안 코칸드 칸국 남단의 부하라 칸국은 코칸드 칸국의 우라투베와 호젠트를 점령하여 부하라와 러시아간의 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1867년 부임한 투르키스탄 지역의 러시아 총독 카우프만은 부하라가 성전을 선포하자 부하라 칸국의 제 2도시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해버린다. 그러나 영국의 참전을 우려한 러시아 중앙정부의 우려로 인해서 부하라 칸국과 1868년 조약을 체결한다. 이로써 부하라 칸국은 비록 수도는 점령당하지 않았고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사실상 속국이 되어버린다.
부하라 칸국 이후 러시아는 적대적이던 히바 칸국마저 응징하고 러시아의 영향권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히바 칸국의 무함마드 라힘 칸은 러시아에 항전하였으나 앞선 두번의 원정과는 달리 러시아가 수로를 이용하여 1869년 침공하자 크라스노보드스크를 빼앗기게 된다. 1871년 잠시 야쿱 벡 사건으로 주춤했던 러시아의 침공은 1873년 재개 되어 히바를 점령하고 러시아는 조약을 체결한다. 러시아가 히바 칸국을 공격한 것을 두고 러시아제국의 군사 원정 "히바 전역"이라고 부른다. 히바 칸국은 부하라 칸국보다 더 나아가 히바의 군주가 러시아에 순종하는 신하임을 확인하고 외교권과 전쟁선포권까지 박탈 당해야 했다.
러시아는 중앙 아시아로 진출하여 카자흐, 히바, 코칸드 같은 적대세력의 위협에서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영국과의 경쟁과 안전한 국경과 주변국의 도발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중앙아시아 진출을 시행하였다. 러시아의 경쟁국인 영국은 인도를 장악하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채 그 지역의 군소 정권들을 조종하면서 시대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이른바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소비에트 연합이 붕괴할때까지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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