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 백제의 전성기
백제는 8대 고이왕대를 거쳐 4세기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고이왕은 백제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에 힘써 백제의 기틀을 잡고 발전을 이끌었다. 이러한 백제의 성장은 고이왕 이후의 왕들인 책계왕, 분서왕, 계왕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노력은 13대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사업으로 나타났다.
근초고왕은 동쪽 낙동강 유역과 전라도, 지리산 일대에서 가야의 소국을 정복하고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복했다. 가야를 흡수하므로 인해 영토를 남해안까지 확대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은 여전히 마한의 전통을 가진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백제의 중앙집권 체제에 들어오지 않은 소국이 산재하고 있었다. 이곳에 근초고왕은 대외팽창을 통해 백제의 영향력을 넓히려 한 것이다.
근초고왕은 기수를 북으로 돌려 한사군의 하나인 대방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직접 근초고왕이 정예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죽였다. 당시 전투에서 평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백제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때 백제가 차지했던 땅은 전라도와 충청도는 물론이고 강원도와 황해 일대에 이른다.
백제는 서해안을 끼고 성장했기에 해상세력으로서도 발전하였는데,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하던 중계무역을 이용해 해상무역로를 개척하였다. 이를 토대로 백제는 해상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이러한 해상활동은 바다 건너 왜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토대가 되었다. 이때 백제인들 상당수가 왜로 건너가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도래인이라고 부른다.
백제의 체제 정비가 대략적으로 마무리되는 4세기에 백제는 관등제를 확충하고, 왕위도 부자상속으로 바꾸어 위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광개토왕이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에 확충된 군사력으로 남방정책을 추진하자 백제는 이에 대응하면서 국력을 소모하였다. 그러다가 475년 지금의 위례성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에 압박을 받던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응하였다.
신라와의 동맹인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의 진격을 막아낸 백제는 내부적으로 정비를 진행하고 국력을 기르는데 힘썼다. 또한 서해안을 통한 외교로를 통해 남중국 왕조와 왜와 적극적으로 펼쳐 대외적 안정도 꾀하며 잃어버린 국력의 신장에 신경을 썼다. 이러한 노력으로 백제는 538년 지리상으로 좁은 웅진을 버리고 평야 지대인 사비로 다시 천도하였다. 백제 성왕은 이곳에서 남부여로 국호를 고치고 중흥을 꾀하였다. 그 사이 고구려가 왕위를 놓고 지배층이 분열한 사이에 신라와 함께 한강유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백제군 3만이 몰살당하면서 백제의 국운은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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