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국가의 정비가 대략적으로 마무리되는 4세기에 백제는 관등제를 확충하고,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으로 바꾸어 위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4세기 후반, 5세기 초반에 확충된 군사력으로 남방정책을 추진하자 백제는 급속히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475년 지금의 위례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한성점령에 의해 단시간에 이루어진 급작스러운 천도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배경에는 당시 개로왕대 백제에서는 무모한 권력행사로 백제 지도층 분열이 원인였다. 게다가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를 둘러싸고 펼친 외교전에서 실패한 것이 주효했다.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백제의 외교는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한성은 고구려가 점령하였고, 백제 지도층은 천도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백제 지도층은 고구려군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했다. 남쪽에서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지금의 공주지역이 북으로는 차령산맥으로 막혀있고 금강으로 싸여있어 방비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계롱산이 동쪽을 막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가 있는 북쪽과 남쪽을 모두 지리적 장애물이 완비된 공간이었다. 또한 금강을 통해서 서해로 나아가 중국과의 외교를 지속할 수 있었고, 남쪽에는 곡창지대인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 가장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백제 지배층은 웅진으로의 천도를 실시했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지 60여년이 지난 538년 성왕대에 백제 지도층은 다시 천도를 논의한다. 웅진은 북쪽과 남쪽에 지리적 장애물이 있어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좋았지만, 공간이 협소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렇게 도읍으로서의 웅진이 역할을 다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사비지역으로 천도할 것을 논의한다. 사비는 웅진의 배후 생산기지로서 왕실의 필요한 용품을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성왕은 사비지역을 즉위 초부터 염두에 두고 천천히 천도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사비에 부소산성을 축조하고, 왕궁과 능사, 사원등 기반시설을 조성하였다.
성왕은 사비천도를 통해 왕권강화와 백제 중흥의 성취를 동시에 이루려 하였다. 신라와의 동맹으로 고구려의 진격을 막아낸 백제는 내부적으로 정비를 진행하고 국력을 기르는데 힘썼다. 또한 외교를 남중국 왕조와 왜와 적극적으로 펼쳐 대외적 안정도 꾀하며 국력의 신장에 신경을 썼다. 백제 성왕은 이곳에서 남부여로 국호를 고치고 중흥을 꾀하였다. 고구려가 왕위를 놓고 지배층이 분열한 사이에 신라와 함께 한강유역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맹을 맺은 신라의 배신으로 관산성 싸움에서 중흥을 꾀하던 성왕이 전사하고 신라의 매복에 의해 백제 3만의 병사가 몰살당하면서 백제의 국운은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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