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 10월혁명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등장 그리고 레닌과 ‘전시 공산주의'
볼셰비키는 2월 혁명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의 무능을 딛고 1917년 11월 러시아의 권력을 손쉽게 획득한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수년에 걸친 내전과 투쟁을 딛고서야 그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황폐화된 국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들은 ‘전시 공산주의'라는 극단적인 제도를 탄생시켰고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유지했다.
전시공산주의를 이끈 인물은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이었다. 레닌은 10월 혁명 이후 당뿐아니라 정부도 이끌게 되었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1870년생으로 장학사 아버지를 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카잔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레닌은 일찍이 급진주의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활동했다. 이 활동으로 인해 시베리아에서 3년간 유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레닌은 자신이 지휘해 얻은 10월 혁명의 결실을 약 2년간 충분히 활용했다. 1922년 5월 뇌졸중으로 인해 거의 활동을 못하게 되고, 1924년 1월에 사망할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볼셰비키 집권 초기 몇 개월 동안은 볼셰비키 권력이 전국에 확대되었다. 그러나 제헌의회가 소집된 1918년 1월 볼셰비키는 위기를 겪는다. 레닌도 언급했다시피 임시정부의 잘못중 하나는 제헌의회 소집을 너무 늦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1월 중순, 제헌의회 선거가 제한적이나마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선거결과는 사회주의자들의 승리였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게되었고, 이들은 이것을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볼셰비키는 혁명이 위험에 처했다고 주자하며 제헌의회 회의를 연기시키려했고, 일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체포했다. 또한 제헌의회를 개회하고 바로 군대를 동원해 해산시켜버렸다. 의회해산 반대시위가 일어났지만 곧 와해되었고, 뒤이어 발표된 전쟁 종료와 토지개혁에 대한 발표로 인해 더 이상의 저항은 없었다.
전쟁을 끝낸다고는 하였으나, 국가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국내외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기에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독일은 러시아에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고, 레닌은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1918년 3월 3일 조인되었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러시아는 약 220만 ㎢의 영토와 전체 인구의 26%를 잃는 가혹한 조건에도 조약을 맺었으나 독일이 패망하면서 조약은 발효되지 않아 러시아는 큰 손해는 면하였다.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독일에 굴욕적 조약을 맺은 레닌 덕분에 오히려 소비에트 정부는 존속될 수 있었다.
레닌은 재빠르게 러시아를 재정비하고 변화시키고자 했다. 볼셰비키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러시아를 재정비하려했고 이는 전시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급진적 동원정책으로 나타났다. 산업의 국유화는 법제화 되어 확대되었고, 거의 모든 사기업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강제노동에 투입되었으며 배급제와 토지 국유화가 실시되었다. 게다가 식량 징발령이 떨어져 농민과 정부의 대치가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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