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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16

[중앙아시아사]- 몽골제국 톨루이 가문과 쿠빌라이의 즉위 [중앙아시아사]- 몽골제국 톨루이 가문과 쿠빌라이의 즉위 1251년 징기즈칸의 4남인 톨루이 가문은 징기스칸이 직접 후계로 정한 우구데이 가문에게서 자신들의 후계로 카안의 자리를 빼앗아 왔다. 뭉케 카안이 1259년 7월 사천 조어산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카안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카라코룸에 다시금 계승 문제로 인한 긴장케하였다. 이번 계승 분쟁은 뭉케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경합을 벌였다. 뭉케카안이 갑작스럽게 사망할 당시 쿠빌라이는 남송 원정군을 이끌고 남 중국에서 화이수이를 건너려던 참이었고 아릭 부케는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후방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카안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쿠빌라이는 남송원정을 중단하고 북상하다가 도중에 독자적으로 개평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1260년 4월.. 2022. 6. 18.
[중앙아시아사]- 몽골 제국 왕권 계승 전쟁의 종식 징기즈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계의 적통인 쿠빌라이칸은 1260년 몽골제국의 5대 칸에 올랐고, 대원제국을 설립했다.1271년의 일이다. 쿠빌라이 칸은 재위 내내 제국내의 반란에 시달려야했다. 앞선 1260년 즉위 당시 아릭부케와의 갈등으로 몽골 제국은 왕권 계승전쟁에 휘말렸다. 쿠빌라이는 1260년 아릭 부케를 토벌한다고 선언하고 그해 6월 아릭 부케의 세력 일부를 쓰촨성 부근에서 제거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며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릭 부케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쿠빌라이를 비난했다. 두 세력은 계속해서 카라코룸을 두고 격돌 했으며 이 일대는 황폐화 되었다. 또한 싱안링 산맥 울루스들의 맹주 나얀은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추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징발과 통제를 강화하고.. 2022. 6. 17.
[중앙아시아사] - 징기스 칸 사후 몽골제국의 권력다툼 징기즈칸은 1227년 대외원정을 가던 도중 사망하였다. 서하 원정 당시 사망하였고 위대한 칸의 죽음에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그것은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징기즈칸은 생전에 셋째아들인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해두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막내아들인 톨루이는 몽골의 관습에 따라 특수지위인 ‘화로의 주인’을 이용해 후계자가 되려고했다. 몽골족은 자식들이 커서 분가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아 분가하지만 막내는 마지막에 아버지의 남은 재산을 갖게된다. 이를 화로의 주인이라고 하는데, 이로인해 몽골은 말자상습이라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말자상속은 아니고 남은재산을 모두 물려받는 전통이다. 막내 톨루이는 쿠릴타이 개최를 미루면서 까지 기회를 엿보았지만 징기즈칸의 유언을 묵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 2022. 6. 2.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후예: 서요(西遼)의 등장 - 카라 키타이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후예: 서요(西遼)의 등장 - 카라 키타이 흔히 불리는 ‘서요’ 또는 몽골인들이 부른 ‘카라 키타이’는 1125년 거란 제국이 여진에 의해 멸망하자 서방으로 이주한 거란세력을 일컫는다. 거란 유랑민의 지도자는 야율대석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기병 80~200명의 소수의 군대와 함께 인산 산맥을 넘어서 몽골 초원으로 피신했다. 톨라 강 유역의 상류에 과거 위구르 제국의 중진이었던 카툰성으로 가게 된다. 카툰성은 진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이곳에 이른 야율대석은 카툰선 인근 7주의 장관과 18부의 수령들을 소집했다. 여기서 1만여명의 병력을 모았고, 그리고 거란제국의 강역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단합을 호소 했고 상당수의 유목 군대를 소집하는데 성공했다. '서요'는 중국.. 2022.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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