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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세계 제국의 붕괴, 당나라의 멸망과 황소의 난 [중국사]- 세계 제국의 붕괴, 당나라의 멸망과 황소의 난안녹산의 난 이후 당나라의 국정은 혼란스러워졌다. 당 중앙정부와 번진의 갈등, 조정 내부에서의 환관세력, 권력을 향한 암투의 심화와 이에 따른 민생의 어려움이 모두 겹쳐진 결과였다. 변경에서 당을 에워싸듯 설치되었던 번진은 내지로 옮겨졌다. 본디 번진의 역할인 변경의 방어가 아닌 수도 근거리에서 반란 진압을 하기 위해서였다. 50개의 번진 가운데 40개의 번진이 내지로 옮겨졌다. 내지의 번진 가운데 일부는 징세, 사법, 군사등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소왕국적 면모를 가진 번진도 있었다. 특히 천웅, 성덕, 노룡 등의 하북 삼진은 노골적으로 당 중앙정부에 저항했다. 번진을 당 중앙정부에 순응하게 만드는 작업 즉, 번진간섭은 당 왕조에게는 사활이 걸린 .. 2024. 8. 22.
[중국사] - 후금, 만주족의 등장과 청나라의 중원 정복 [중국사] - 후금, 만주족의 등장과 청나라의 중원 정복 명이 사회적 혼란에 휩싸여 주변 민족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자 만주에서 새롭게 세력이 흥기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만주족이라 부르며 활동하였다. 만주족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누르하치였다. 그는 건주여진에 속한 건주좌위에 속했고, 여진족의 지배층 출신이었다. 당시 명의 요동 대장 이성량 휘하에서 세력을 키워왔다. 그러나 여러가지 가설과 추측이 있지만, 명이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을 살해한 것을 구실로 누르하치는 명 세력과의 갈라선다. 그 후 누르하치는 군사를 일으켜서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던 여진을 통일했다. 만주에 흩어져서 살던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을 규합한 누르하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여진을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으로 통합.. 2024. 8. 19.
[중국사] - 명나라 말기 이자성의 반란과 청나라의 명나라 정복 [중국사] - 명나라 말기 이자성의 반란과 청나라의 명나라 정복 명나라가 세워진 이후 200년이 지나 16세기 말로 들어가면서 명의 사회모순은 에 달했다. 16세기 중반 명의 재상 장거정의 개혁으로 사회 혼란을 바로잡고 민생안정을 도모했던 명이지만, 장거정이 죽자 관료와 환관, 신사층의 불만이 쏟아지면서 명의 체제는 천천히 붕괴되어 갔다. 특히 보바이의 난, 임진왜란, 파주토사 양응룡의 반란 등 다양한 반란이 일어나면서, 명은 장거정 사후 다시금 재정적자에 허덕이게 되었다. 재정적자에는 황실 유지비용도 한몫하였다. 만력제를 비롯한 황족들의 사치 또한 적자의 원인이되었다.  이러한 명의 적자재정을 메우기 위해서 전국으로 파견된 환관들은 막대한 권한을 휘둘렀다. 지방의 은광을 개발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파.. 2024. 8. 18.
[중국사] - 명 최초의 반정, 정난의 변과 영락제의 등장 [중국사] - 명 최초의 반정, 정난의 변과 영락제의 등장 홍건적 출신으로 명까지 건국한 주원장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장남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다. 나머지 아들들은 변경의 왕으로 임명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주표는 40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이에 주원자은 주표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했다. 주원장 자신이 죽은 뒤 어린 황제에게 숙부들의 핍박이 너무나 당연시 되는 상황이 되었다. 주원장은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수도인 남경으로 오지말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리를 지키라는 유서까지 남기기도 하였다. 자신의 장례를 구실로 아들들이 황태손에게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행동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신임을 잃었고, 말년에는 고독하게 병사하였다. 71.. 2024. 8. 17.
[중국사] - 유목민족의 국가 원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 등장 [중국사] - 유목민족의 국가 원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 등장 쿠빌라이가 대원을 선포하고, 중원을 통치를 시작한지 어언 100년이 흐르자 원나라의 통치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지배계층의 대부분을 이루는 한족과 지배계층인 몽골족의 갈등, 몽골의 통치세력은 라마불교에 심취하여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고, 이는 곧 피지배계층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고 잇따른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여기저기서 반란의 깃발이 일어났다. 중국 하남지방의 백련교 교주인 한산동과 유복통은 이러한 원말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이용하였다. 이들은 백련교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한산동이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으며, 한족 왕조의 정통성을 얻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모자 한산동은 .. 2024. 8. 16.
[중국사] - 대륙을 휩쓴 몽골 제국의 완성과 새로운 울르스 [중국사] - 대륙을 휩쓴 몽골 제국의 완성과 새로운 울르스 바투의 원정군은 러시아의 원정 도중 갑작스럽게 철군을 결정한다. 철군 이유는 우구데이 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후임 칸의 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우구데이 칸의 후임은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 칸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구유크 칸이 병사하게 되므로서 후임 칸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균열이 생겼다. 혼란 끝에 선출된 몽골 제국의 4대 칸은 뭉케였다. 뭉케 칸은 즉위 직후 혼란에 둘러싸인 몽골 내부를 수습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갑작스러운 계승 혼란이 수습되자 몽골은 다시 대외 원정에 나섰다. 뭉케의 지휘 아래 지목된 공격지는 서아시아와 남중국이었다. 원정군 사령관은 자신의 동생인 훌레구와 쿠빌라이를 임명하였다. 1252년 두 방향의 원.. 2024. 8. 16.
[중국사] - 징기즈칸의 아시아 제패와 최강 몽골군의 대외 정복 전쟁 [중국사] - 징기즈칸의 아시아 제패와 최강 몽골군의 대외 정복 전쟁  13세기 접어들면서 유라시아 대륙은 금나라와 송나라를 넘어,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며 전란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아시아 내륙 오로도스 지역에서 흥기한 몽골 부족은 주변의 부족을 흡수하며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했다. 1189년 칸에 추대된 테무진은 몽골 부족을 이끌고 1203년 케레이트를 격파한다. 케레이트 격파 후 이듬해 1204년 나이만을 격파하고 1205년 테무친은 메르키트까지 격파한다. 결국 1206년 몽골 초원을 통일한 테무친은 초원의 유일한 대칸인 징기즈칸으로 즉위한다. 당시에 북중국을 점거하고 몽골 초원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금나라는 초원의 부족들이 힘을 규합하지 못하도록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정책을 펼쳤는데, 테무.. 2024. 8. 15.
[중국사] - 금나라를 물리친 몽골의 중국통일, 마지막 한족 장군 악비와 남송의 최후 [중국사] - 금나라를 물리친 몽골의 중국통일, 마지막 한족 장군 악비와 남송의 최후 몽골은 남송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1234년 끈질긴 추적해 남으로 도망친 금을 멸망시켰다. 뒤이어 몽골은 1235년 남송을 다음 목표로 생각하고 전투를 치뤘다. 전투의 시작은 몽골이 선수를 쳤다. 1년 전에 있었던 남송의 화북 침공, ‘단평의 입락’에 대해서 남송의 책임을 물어서 이를 명목으로 병력을 남송으로 보내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남송의 방어가 생각보다 단단하였고, 강이 많은 강남의 지형은 몽골 군대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게다가 1241년 몽골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면서 몽골과 송의 전쟁은 종식된다. 두번째 몽골군의 공격은 1258년이었다. 사천의 조어성을 배경으로 몽골군의 대대적 공격이 있었다. 뭉케 .. 2024. 8. 14.
[중국사] - 남송과 금, 혼란의 동아시아와 초원의 끝판왕 몽골 [중국사] - 남송과 금, 혼란의 동아시아와 초원의 끝판왕 몽골  금나라가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흠종을 금나라로 끌고가고 송은 멸망하게 된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 그러자 송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가 남쪽으로 세력을 이끌고 도망쳐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였다. 금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 강남에서 송을 재흥하였는데 이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북송이었을 당시에는 중국전역을 지배하였지만, 남송은 금에게 화북지방을 내어주고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남중국 일대만을 지배 할 수 있었다. 송 고종은 금의 공격을 피하여 양자강을 건너서 항주로까지 피신했지만, 금나라는 필사적으로 추적하였다. 고종이 추적을 피해 항주로 수도로 결정한 것은 남송 건립 5년만의 일이었다. 1132년 항주를 임안으로 개칭하고 남송의 수도로.. 2024. 8. 13.
[중국사] - 여진족의 금 등장과 송 최대의 치욕, 정강의 변 [중국사] - 여진족의 금 등장과 송 최대의 치욕, 정강의 변 거란과 송이 화북을 두고 대치하던 시기인 11세기 초, 거란의 뒤쪽 만주 일대에서는 새로운 민족이 발흥하여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 세력은  말갈이라 불리던 부족인 여진이다. 여진의 발흥은 송나라, 요나라, 고려의 균형을 이루던 동아시아 전역을 다시금 전란으로 몰아간다.  여진은 기본적으로 반 농경 반수렵을 병행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 건국되자 발해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요나라에 의해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다시 거란, 요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발해시절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계속 가지고 있었고, 요나라 시기에도 복속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여진이 요나라에 귀속한 정도를 가지고 남쪽의 숙여진과.. 2024. 8. 12.
[중국사]- 당 현종과 양귀비, 사그러지는 당나라 [중국사]- 당 현종과 양귀비, 사그러지는 당나라 측천무후로 인해 단절되었던 당 왕조는 중종의 복위로 인하여 다시 복원되었다. 그후 예종이 즉위 하였고 다음으로 예종의 3남인 현종이 6대 황제로 즉위하여 당을 개원의 치세라는 전성기로 이끌었다.  당 태종 시기 300만 미만이던 호구수가 현종치세 726년에는 두배인 706만호로 늘어났다. 경제적 호황기를 맞아 쌀값도 저렴하였고, 태평의 시대로 평가된다. 그러나 국가의 근간이던 균전제와 부병제등 율령체제가 붕괴될 조짐이 보이던 때 역시도 이때이다. 토지 환수가 안되어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균전제가 흔들렸고, 균전제 위에 기초한 부병제도 덩달아 부실해져 갔다. 빈농은 고향을 등지고 토지를 떠나 유랑민이 되어갔다.  당 현종은 황후가 죽은 뒤 자신의 며느리.. 2024. 8. 11.
[중국사]- 고구려 멸망의 주인공,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사]- 고구려 멸망의 주인공, 당 고종과 여황제 측천무후당 고종은 당 태종이 마무리 짓지 못한 고구려 원정과 나당전쟁을 마무리하고 동쪽의 정벌을 마무리한다. 비록 신라는 동쪽에 남아있었지만, 가장 위협적이었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의 철광석과 만주의 생산력에 대한 것들을 이미 차지한 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가지 고종대에 주목할만 것은 중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가 있다. 그녀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태종이 죽자 감업사의 비구니로 출가한다. 당시 법도로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그를 눈여겨 보던 태종의 아들 고종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어머니뻘이던 여자를 다시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후 후궁의 자격으로..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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