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개혁과 쿠테타
1985년 소비에트의 지도자로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와 동유럽에서 전개되던 사건들은 소비에트 지도부는 물론이고 모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소비에트 경제의 낮은 경제성장률은 비판론과 결부되어 그에게 사회 개혁의 의무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었을 때 우선 소비에트 내외에 산적한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소비에트에 산적한 문제는 우선 낮은 경제성장률, 생활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암울한 농업 상황, 제조업의 질 하략, 과학 기술분야에서 세계의 발전 수준에 뒤떨어지기 시작한 것, 국민 총생산대비 국방비의 과도한 비중 등이었다. 경제적 위기와 더불어 정신문화적 상황도 이와 비견되었는데, 노동에 대한 존중심 약화, 비관주의, 냉소주의 등 정신적인 재건축(페레스트로이카)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했다.
1985년 3월 11일에 출범한 고르바초프 체제는 초기 2년에서 3년간 아주 전통적인 운영을 보여주었다. 정치국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는데 집중했고, 일정기간 고위 행정직 인사들을 교체했다. 고르바초프는 개혁의 필요성애 대해 주장했지만 그의 실제 정책은 조심스러웠고, 비교적 전통적이었다.
1985년 10월에 고르바초프는 장비의 현대화와 노동생산성 향상에 강조점을 두며 “가속화"라는 경제정책을 제시했다. 알코올 중독에 반대하는 캠페인, 무단결근 반대, 반부패 캠페인을 벌였다. 여기에 몇달이 더 지나면서 좀더 급진적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초기 개혁들은 어느것도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경제는 단순한 권고에 변하지 않았으며, 사실 정부의 재정정책은 예산부족과 물가상승을 초래했고, 사태는 악화되었다. 알콜 중독 캠페인조차 불법 증류주 생산을 부추기는 꼴이 되었고, 경제는 상점에 설탕이 없어질 정도로 악화되었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실패가 계속해서 소비에트 재정에 부담이 되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86년 4월 28일 체르노빌에서 핵원자로가 폭발했다.
1986년을 기점으로 뒤로 갈수록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더 급진성을 띄기 시작했다. 반소비에트 선전에 대한 정의가 1987년 크게 축소되면서 정치범들은 석방되었고, 기업들은 가격, 임금, 생산 목표등에서 큰 자율권을 얻으면서 중앙계획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다. 사기업이 생겨나고 외국 기업과 합작법인이 등장하였으나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변화가 소비에트가 고수해온 ‘사회주의적 선택'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소비에트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빈곤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민중봉기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삶의 질 개선과 생활조건 개선등을 요구했으나 점차 민족주의적 성격을 띄었다. 소비에트의 압제아래 숨죽여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이 부흥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발트, 캅카스 남부,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독립투쟁이 이를 보여준다. 이 투쟁들로 인해 16-17세기 러시아가 겪었던 동란의 시대가 다시 국가적 측면에서 나타나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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