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청 몰락의 시작, 아편전쟁
19세기 들어와 청왕조와 중국 사회는 안정과 번영의 시기를 지나, 이전과는 다른 쇠퇴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장기적인 평화에 따라 늘어난 인구는 19세기에 세계인구의 1/4를 차지하는 4억 500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지탱해야할 사회 시스템은 이미 낡아버린 청조의 것이었고, 물적 기반 역시도 미약했다. 4억에 이르는 인구를 부양할 자원의 개발이나 생산성 향상, 기술 발전은 인구의 증가 속도보다 느렸고, 이는 사회적 불균형과 위기를 부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민중의 반란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인구의 증가 압력을 버티지 못한 생태계도 붕괴하여, 산사태,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응해야만 하는 청조의 능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그리고 이때는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 열강이 무역이라는 명분으로 군사력을 앞세워 동양으로 진출하는 이른바 서세동점의 시대였다. 동아시아에서 오래전부터 형성되어있던 조공무역에 서양열강은 해관을 열어달라 간청하여 무역을 시작하였다. 특히 영국은 18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 무역의 강자로 등장했다.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차와 도자기 비단, 면직물을 수입하였다. 대신 모직물과 면화 등 자국의 공장제 생산품을 팔려했다.
문제는 이 품목에서 발생하였다. 영국이 수입하는 품목은 매우 비싼 사치품이지만 영국에서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특히 차는 귀족들의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수출되는 모직물, 면화는 중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중국의 기후와 민중의 선호도가 모직물을 선호하는 쪽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있는 수요도 중국 내부에서 모두 자족할 정도였다.
수입과 수출의 불균형은 당시 화폐로 쓰이던 은이 모두 중국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영국은 만성적인 은 부족에 시달렸고, 전세계 식민지 경영으로 긁어모은 은 중국에 차 대금을 지불하는데 모두 쓰이게 되었다. 은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경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균형 거래에 영국은 매우 큰 불만을 품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십만kg 단위의 은을 적자로 기록했고, 19세기 초반엔 거의 백만kg의 은을 적자로 기록해야 했다.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영국은 결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청 황제는 여러차례 명을 내려 아편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1780년 무렵 약 1000상자에 달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 1만상자, 1차 아편전쟁 직전인 1840년 직전에는 4만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아편 밀수의 증대로 수백만의 중독자가 생겨났으며, 아편 구입의 대가로 지불된 백은이 해외로 대량 유출 되었다. 당시 백은은 납세의 단위인 기본 화폐이기도 했기에 아편의 유행과 은의 유출로 인해 중국의 화폐, 금융, 재정체계는 속절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청은 어쩔수 없이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아편에 대해 대응책을 낼 수 밖에 없었다. 1838년,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주에 파견하였다. 임칙서는 이곳에서 아편을 몰수하고, 다시 사용할 수 없게끔 모두 바다에 회를 섞어 버리게 하였다. 거기에 수입금지라는 강경책까지 취하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자국의 상인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청에 파병을 결정한다. 이렇게 발발한 전쟁이 아편전쟁이다.
1840년 6월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영국의 함선 48척과 군인 4천여명이 베이징 바로 앞인 천진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1841년 1월 지금의 홍콩과 마카오 사이에 있는 주강에서 천비해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4시간만에 끝났으며, 영국군의 피해는 38명인데 비해 청의 사상자는 포로를 포함해 800여명에 달했다. 청 군대의 명백한 패배였다.
하지만 청은 이러한 패배에 납득하지 못했고, 3월에 다시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결국 청군은 거듭해서 패배했으며 1842년 7월에는 난징의 핵심기지인 진강까지 함락되었따. 청조는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동원하여 영국에 대항하였으나 메울수 없는 정도의 간극을 보인 기술력과 장비, 해군력의 차이로 연안 도시를 공격하는 영국 해군을 이기지 못했다.
청 조정은 결국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영국과 타협하는 방안을 택했다. 1842년 체결된 남경조약으로 청은 광주 등 5개의 항구를 개항하게 된다. 홍콩이 이때 영국에게 할양된다. 난징조약은 전 세계에 중국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으며, 동아시아에 드리워지는 제국주의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중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사] - 새로운 희망, 청의 변법자강운동 (13) | 2024.10.02 |
---|---|
[중국사] - 청 몰락의 신호탄, 태평천국의 시작 (6) | 2024.10.01 |
[중국사] - 청대 백련교도의 난, 청의 백련교 진압 (11) | 2024.09.21 |
[중국사] - 청 건륭제 치세와 대일통사상, 청의 황금기 (1) | 2024.09.20 |
[중국사] - 청대 옹정제의 개혁과 개토귀류 (1) | 202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