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일제의 침략, 만주사변과 2차 국공합작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로 남만주와 동북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928년 남경국민정부가 성립하고 세계대공황이 닥쳐오자 일본은 만주와 몽골에서의 이권확보를 국가의 생존에 관련된 사항으로 인식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 하였다. 1931년 9월 만철노선 폭파사건을 빌미로 관동군은 동북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5개월만에 점령하였다. 일본의 만주침략은 관동군의 독단적 행동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묵인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그렇게 15년에 걸쳐 일본의 대륙침략전쟁이 시작되었다.
남경정부는 일본의 불법척 침략을 규탄해줄 국제연맹의 외교적 해결을 기다렸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실질적 구속력이 없었고, 남경정부 역시 일본군에 완강히 저항할 힘이 없었다. 만주사변으로 불린 이 침략으로 인해 1932년 3월 1일에는 일본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탄생했다.
국제연맹은 이 만주사변을 조사하기 위해 1931년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하고, 중재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만주의 공동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해버리는 등 외교적 마찰까지도 불사하였다. 일본은 계속 대륙으로 진격하였고, 화북지방의 5성을 점령하여 자치를 내건 지방 정권을 만들었다. 이는 화북 5성의 자원과 시장을 수탈하기 위한서이기도 했으며, 화북에서 남경국민정권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려는 목적이기도 했다.
이에 장개석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중공업을 발전시켰고, 국민당군을 170만의 병력을 갖춘 군대로 편성하여 총동원 체제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의 기존 노선은 민중의 항일 운동을 억누르는 기존의 정책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1937년 들어와 사태는 급변하였다. 7월 7일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일으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였다. 이에 중국측에서 자위항전 성명을 발표하며 전쟁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중일전쟁으로 부르며 전쟁이 본격화 되었다. 상해와 남경이 연속적으로 함락되었으며 점령 이후 남경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난징대학살로 불리는 잔인한 학살극이 도시 곳곳에서 펼쳐졌다.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폭격을 피해 호북성, 사천성 등으로 수도를 옮기며 계속 저항하였다. 1938년까지 일본군은 중국 전역에서 철도와 도시를 중심으로 점령을 계속하였으나, 서남지역을 후퇴한 국민정부에는 더 이상 타격을 가할 수 없었고, 전선은 1944년까지 고착되었다. 미국 등 국가들의 원조가 동남아시아를 통해 들어오기도 했고, 1941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일본이 더 이상 중국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 덕분이기도 했다.
남경정부가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으면서 민심을 잃자, 중국공산당은 항일운동 발전을 당의 성장에 이용하였다. 대장정 도중 발표한 선언 등을 통해 민중에게 국민당과 함께 세력을 연합해 항전을 추진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장정을 끝내고, 공산당은 계급투쟁이 아닌 장개석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는 것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이러한 거국적 항일 의지는 기치는 높았으나, 공산당과의 합작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웠다. 국민당은 일본과의 전쟁중에도 공산당 토벌을 위한 6차 포위작전을 감행하는 등 2개의 전선을 펼치는 악수를 두었다. 이러한 행보는 민중들이 국민당에게서 등을 돌리게되는 이유중 하나였다. 이러한 국면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서안 사건이었다. 동북군 출신의 장학량은 서안을 방문한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을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중지와 항일전쟁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은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소비에트 정부는 특별구 정부로, 홍군은 팔로군 3개 사단, 유격대는 신사군으로 개편되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국공합작의 성립으로 일본에 대한 단일 항전노선이 마련되었으나, 일본군은 여전히 파죽지세로 중국 북부와 남부에 대해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유격대는 화북지방에서 농민을 동원해서 후방지역과 철도를 공격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1936년 무렵에는 1만여명에 불과했으나, 10년이 지난 1945년 무렵에는 100만에 가까운 세력으로 성장했다.
중국공산당의 폭발적인 성장에 놀란 장개석은 1941년 화남의 신사군을 양자강 이북으로 옮기도록 요구하고, 이동중인 신사군 9000명을 안휘성 남부에서 포위하여 섬멸했다. 이 사건으로 그때까지 유지되던 국공합작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모택동은 다가올 일본의 패망과 국민당과의 전쟁에 대비하면서 농촌에서 영향력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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