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대륙을 건 전쟁,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중국에서의 전쟁도 종료되었다. 중국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중국인 2000만명이 죽고, 5000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국민들은 경제회복과 새로운 국가건설이 염원이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패권다툼이 남아있었다.
진격하는 일본군을 피해서 중경으로 천도했던 국민당 정부는 부패로 인해 악명을 떨쳤다. 게다가 일본군이 점령했다가 국민당 정부로 복귀한 도시들에서는 일대 혼란이 연일 이어졌다. 국민당군은 놀랍게도 수복한 도시들을 약탈하고 자원을 압수를 했다. 이로 인해 도시의 경제는 붕괴되어갔다. 마치 점령군같이 행동하는 국민당군에 대해서 중국의 도시민에게서 강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아와 내전, 박해를 반대하는 학생운동들이 불법화 되기 시작했고, 중국민주동맹은 1947년 10월 불법화 되었다.
국민당의 상황에 반해 중국공산당은 일본이 항복하던 당시 약 19개소의 소비에트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지도자로 모택동의 권위를 확립시키고, 연합정부론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전국적인 여론은 내전을 지양하고 평화통일을 바라는 분위기였다. 미국에서 파견된 마셜을 매개로 정전협정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갈등이 오래된만큼 공존은 쉽지 않았다. 협상을 시작했으나 결국 공동정부는 결렬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심화되던 갈등은 결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에 의해 깨지게 되었다. 1946년 6월 26일 장개석이 정규군을 동원해 공산당을 공격하면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국민당군 160만명은 소비에트 해방구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게다가 11월에는 민주당과 공산당을 제외하고, 국민대회를 통해 헌법을 통과시켜 입헌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국민당의 행보에 공산당도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공산당은 도시와 철도를 점령한 국민당군에 대해서 게릴라 전술을 펼쳤다. 이는 일본군에 대응했던 전략을 그대로 국민당군에게 시행한 것이다. 거기에 농촌으로 들어가 경작자가 토지를 가지게 되는 토지혁명을 진행하여,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냈다. 국민당이 지도에서 점으로 나타나는 도시를 바탕으로 기반을 유지했다면, 이들은 농촌을 기반으로 자신의 기반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중국은 절대다수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이 국민당의 손에 잠시 넘어가기도 했으나, 곧 공산당 인민해방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공은 우선적으로 동북지역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군을 고립시켰고, 여기서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화북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때가 1948년으로 이때 거의 승리가 확실시 되었고, 1949년 12월 정도에는 대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국이 모두 공산당의 지배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장개석은 50만의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패주하였다. 이를 국부천대라고 부른다. 국민당군 병사와 피난민 200만명은 대만으로 들어갔으며, 패주하면서 본토에서 모은 중국의 보물을 비행기에 실어 대만으로 가져갔다. 2차 국공내전은 결국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1949년 10월 1일에는 천안문 광장에서 모택동은 중국인민은 일어섰다 라고 말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새롭게 형성된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의 지도아래 독재를 취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국가였다.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은 하나의 중국을 외치며 대만을 탈환하려 요충지인 진먼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지금까지도 대만을 바라만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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