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 대륙통일과 독재의 시작,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중국은 인민공화국 설립에 앞서 새로운 중국의 정치제도를 준비하였다. 이들이 구상한 새로운 중국은 노동자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국민당에 대한 독재를 취하는 인민민주주의독재국가 였다.
건국 이후 공산당의 급선무는 외교관계를 통해 소련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1949년 12월 중국을 출발한 모택동이 3개월간이나 소련에 머물면서, 우호조약을 체결한 사실은 중국의 다급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오직 소련만이 중국공산당의 중국을 인정한 상황이었고, 별다른 우방이 없던 중국으로서는 소련의 인정과 관계설정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냉전이 본격화 되던 시기였기에, 소련 역시 중국과의 동맹으로 공산진영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고, 중국은 소련과의 동맹으로 미국이나 서방세계로부터의 위협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인 지원까지 이끌어냈다. 동시에 소련의 체제를 중국이 따라가야할 롤모델로 설정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이 중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에 관여하면서, 어려움에 직면하기 시작헀다. 전후 경제부흥과 새로운 정치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새로운 전쟁은 정권에 또 다른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전쟁은 국제전 성격의 커다란 분쟁이었기에 중국이 치뤄야할 대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전쟁 이후 미국에 의한 경제적 봉쇄조치까지 강화되면서, 중국은 오로지 소련에만 의존한 경제재건을 시작해야 했다.
공산당은 경제개혁에서도 토지개혁에 집중하였다. 토지개혁은 이미 국공내전기에 시작되었는데, 1950년 6월 30일 발표된 토지개혁법은 농민의 토지소유제를 실현하는 목표를 두었다. 지주계급의 토지와 가축 등을 몰수하여 농민에게 재분배하였다. 이 토지개혁은 1952년 말엽에는 모두 종료되어 농촌의 계급구조와 재편이 완료되었고, 농민의 80%는 중농으로 올라설수 있었다.
공업 부분에서는 장기간 전쟁으로 감소되던 생산량이 점차 재건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1952년에는 최고 생산량을 보이던 1936년 수준을 회복하는데 이르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1953년 2월 국가경제 건설 1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었다. 1차 국가경제 건설은 소련식 경제 건설을 목표로 추진되었지만, 1950년대 중반의 상황은 중국의 경제 개발을 낙관적이지 않았다.
최초 1953년 개발계획이 추진될 때에는 매우 순조로웠다. 농업과 공업의 생산증대 목표도 1년을 앞당겨 1956년에 초과달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에서 시작된 탈스탈린주의, 스탈린 비판은 중공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중국 지식인들 역시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1957년 5월 이후 반우파투쟁이라는 형태로 반격당했으며, 이 운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우파 분자'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었다. 이로인해 공산당의 정책은 무조건 옳은 것이 되었으며, 건설적인 반대의견은 나올 수 있는 통로가 완전히 막히게 되었다. 독재체제 아래 중국 사회는 점차 경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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