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초원을 장악하고 있던 유연은 6세기 들어 투르크계 돌궐의 도전을 받게되었다.
552년 투멘의 공격을 받은 유연의 아나괴 이 자살하면서 투멘은 돌궐을 건국한다. 몽골초원의 패자로 나타난 돌궐은 발음상으로는 튀르크로 불리우는 종족이었다. 앞서 초원을 지배하던 유연의 유력 계층은 몽골어를 쓰는 계통이었지만 이들이 나타나면서 몽골 초원은 투르크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초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돌궐제국의 건국자는 중국측 기록에는 토문(土門)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투르크 어에서 10,000을 뜻하는 투멘[tumen]을 옮겨 기록한 말이다. 아마 만명을 거느리는 만호장을 뜻하는 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토문이 즉위한뒤 자신을 일릭이라고 칭했다. 투르크어에서 일[il]은 나라(國)를 의미하고 일릭칸은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 뜻을 가진다. 일릭칸의 돌궐 건국 이래 제국은 확고하게 유지되었고 3대 카간인 무한 칸 치세에는 완전히 기반이 닦였다. 제국의 영역이 동쪽으로는 싱안링 산맥에서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과거 흉노와 유연이 서쪽 파미르 고원을 넘지 않아 카스피해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돌궐의 영역은 서쪽으로 더욱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중국은 북제와 북주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돌궐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했는데 이러한 호재를 두고 돌궐은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돌궐은 제국을 이루어 초원을 점령하고 번영하였다.
돌궐의 건국 집단은 투르판 부근에서 거주했는데 유연을 공격하며 자신들의 근거지를 몽골 서부 외튀겐 산지로 옮겼다. 이곳은 오늘날의 항가이 지방인데 이곳에서 칸은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분할하여 통치했다. 무한 카간은 제국을 셋으로 나누어서 자신은 수도인 외튀켄에 자리를 잡고 동방과 서방은 분할하여 일족에게 통치를 맡겼다. 일부 분할통치였다.
이러한 분할 통치 체제는 약탈경제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돌궐 유목민족 체제에서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는 좋으나 시간이 갈수록 중앙권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지방분권화 현상을 초래하여 제국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돌궐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고 582년 이쉬바라 칸과 다른 중소 칸들 사이에 벌어진 내전으로 인해 돌궐제국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한다. 흉노가 그러했듯 동돌궐의 이쉬라바 칸은 내전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자 고비사막 남쪽으로 세력을 이끌고 내려가 북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 신하를 자청하여 지원을 요청하고 587년 이쉬바라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야브구 칸은 화북지방의 지원을 바탕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몽골초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야구브칸도 서돌궐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고 전투중에 전사하고 만다. 야구브칸의 아들인 계민칸에 가서야 동돌궐은 서돌궐의 타르두칸을 몰아내고 603년 외퇴겐을 정복한다. 이러한 돌궐내 정치적 혼란과 지배집단 내부의 갈등은 돌궐제국의 성장하는데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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