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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중앙아시아사] - 당과 돌궐제국, 돌궐의 서방정책

by Timemapcatographer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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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몽골초원에서 흥기한 돌궐은 제국을 세웠다. 흉노와 달리 돌궐은 영역이 넓어 서쪽 카스피해까지 미쳤기 때문에 당시 서아시아에 존재하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 너머 비잔티움 제국과도 관계를 맺었다. 돌궐제국은 사산왕조와 연합해헤프탈 훈족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강을 기점으로 서로의 영토를 분할 하였다. 이로써 돌궐제국은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돌궐은 초원길을 통한 비단무역을 두고 대립하였다. 돌궐제국은 사산왕조가 영유하고 있던 국제 교역로를 우회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빼앗고자 했다. 그리하여 교역로를 두고 돌궐은 페르시아를 거치지 않고 비단을 교역할 길을 찾기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돌궐의 눈에 들어온 나라가 바로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이었다. 비잔티움은 당시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기에 돌궐에게는 더욱 안성맞춤인 상대였다. 적의 적은 동맹이었다. 비잔티움은 532년 페르시아의 군사적 공격에 의해 지중해의 안티오크를 점령당한 적도 있었기에 비잔티움에게도 사산왕조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돌궐이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되었다.

돌궐이 비잔티움으로 사신을 보낸것은 563년에 일이었다. 돌궐에서는 마니악으로 사신을 보냈고 비잔티움의 유스티누스 2세는 마니악이 귀환할때 제마르코스를 답사로 돌궐에 파견하였다. 비잔티움은 이를 기록하여두었는데 제마르코스는 서돌궐의 카간이 있는 에그타크를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제마르코스가 조국인 비잔티움으로 돌아간 후에도 비잔티움과 돌궐 양측은 꾸준히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비잔티움은 568년부터 576년까지 다섯차례 사신단을 파견했고 이러한 지속적인 관계는 627년 군사적 연합으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도시인 티플리스를 포위공격하는데 기초가 되기도 했다. 이에 서돌궐과 사산왕조는 더욱이 외교관계가 안좋아지는것은 물론이고 군사적 충돌도 일어났다. 그러나 650년대에 이르러 새롭게 중국에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나게 된다. 당은 중국 내부의 역량을 모아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고, 당이 건국된 이후 서돌궐이 당에 복속하면서 이러한 서방세계와의 관계는 지속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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