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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일본사] - 전국시대와 혁명가,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

by Timemapcatographer 2025.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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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와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

일본의 전국시대(戦国時代)는 무로마치 막부의 쇠퇴와 권력 구조의 분열로 인해 시작된 혼란스러운 시기로, 약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지역 다이묘(영주)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권력을 강화하며 서로 전쟁을 벌이던 시대였습니다.

전국시대의 시작

  1. 응인(応仁)의 난 (1467–1477):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후계 문제와 막부 내의 권력 투쟁이 겹치면서 교토에서 시작된 대규모 내전입니다. 이 전쟁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며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었고, 각 지역 다이묘들이 자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응인의 난은 전국시대의 서막으로 여겨집니다.
  2. 슈고 다이묘에서 센고쿠 다이묘로:
    원래 무로마치 막부 체제 하에서 지역을 통치하던 슈고(守護) 다이묘들이 점차 몰락하고, 실질적인 통치력을 가진 센고쿠(戦国) 다이묘들이 부상했습니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무력을 통해 자신의 영지를 확보하고 확대하며 중앙 정치와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과 세력 확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전국시대를 통일로 이끌 중요한 인물로, 하급 다이묘 가문에서 시작하여 일본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 초기 배경과 가독 상속 (1551):
    노부나가는 오와리국(尾張国, 현재 아이치현)이라는 작은 지역의 다이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1551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의 사망 이후 가문의 가독(家督)을 상속받았으나, 그 과정에서 가문의 내부 분열과 외부 세력의 위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2. 기요스 합전과 가문의 통일 (1555):
    가문 내 라이벌들을 물리치고 오와리 지역의 통일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그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3. 오케하자마 전투 (1560):
    노부나가의 가장 중요한 초기 승리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상대로 한 오케하자마 전투였습니다. 이마가와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다이묘 중 하나였으며 2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진군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3,000명의 소규모 병력으로 기습을 감행해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로 노부나가는 전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정치적 입지를 크게 넓혔습니다.
  4. 미노 정복과 기후성 입성 (1567):
    이노우에 사다마사(斎藤道三) 가문을 물리치고 미노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는 미노의 중심이었던 이나바산성을 "기후성(岐阜城)"으로 개명하고, 자신의 통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그는 "천하포무(天下布武, 천하를 무력으로 평정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일본 통일의 야망을 드러냈습니다.
  5.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서막:
    이후 노부나가는 잇코잇키(一向一揆)와 같은 종교적 저항 세력,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같은 강력한 다이묘들과의 전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는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장려했으며, 총포(조총)를 적극 활용해 군사 기술의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최후와 죽음

오다 노부나가의 말년은 그의 세력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이자, 동시에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난 시기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일본 통일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며 군사적·정치적 성공을 거뒀지만, 이러한 권력 집중은 내부의 갈등과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혼노지의 변 (1582):
1582년, 노부나가는 당시 그의 부하 다이묘 중 한 명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사건은 일본 역사에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불리며, 전국시대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꼽힙니다.

노부나가는 1582년 6월 21일, 교토에 있는 혼노지(本能寺) 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토를 통치의 중심지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 방비가 허술했으며, 가까운 병력도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이 틈을 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혼노지를 포위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할복(切腹)을 통해 자신의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시신은 화재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혼노지의 변 이후, 그의 아들 오다 노부카쓰와 동료 다이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유산을 이어받기 위해 움직였지만, 이 사건은 전국 통일 과정에 큰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 이유와 후속 결과: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1. 노부나가의 냉혹한 통치 방식과 부하들에 대한 모욕적인 대우가 원인이었다는 설.
  2. 미쓰히데가 개인적인 야망을 품고 노부나가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다는 설.
  3. 당시 주변 다이묘나 세력들 간의 정치적 암투와 관련이 있었다는 설.

그러나 미쓰히데의 반란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노부나가 사후 불과 13일 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하며 노부나가의 복수를 이루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후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 통일의 과업을 마무리 짓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총포(조총)의 대량 도입, 경제적 개혁, 종교적 저항 세력의 진압 등으로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그의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슬로건은 단순한 무력 통합을 넘어 새로운 국가 체제를 구상했던 그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노부나가의 죽음은 일본 역사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의 업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이어지며 에도 막부 체제로 완성됩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종식시키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오늘날에도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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