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년)
오닌의 난은 1467년부터 1477년까지 교토를 중심으로 발생한 일본 전국시대 초기의 대규모 내전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이 쇠퇴하고 전국 다이묘들이 각자 세력을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이 전쟁은 일본 전역에 걸쳐 봉건 질서를 붕괴시키고, 전국시대(戦国時代)라는 장기적 혼란의 시대를 여는 기점이 되었습니다. 아래에서는 배경, 원인, 전개, 결과, 그리고 의의를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1. 오닌의 난의 배경
무로마치 막부의 설립과 쇠퇴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설립한 무로마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의 뒤를 이은 무사 정권이었습니다. 아시카가 쇼군들은 일본 전역의 다이묘(大名)를 통제하며 중앙집권적 통치를 시도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막부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15세기 중반,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암살당한 후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고,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집권하면서 막부의 통치력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요시마사는 정치에 무능했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정무를 소홀히 했습니다.
다이묘들의 대립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접어들면서 각 지역의 다이묘들은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강력한 권세를 자랑하던 호소카와 가문(細川氏)과 야마나 가문(山名氏)은 무로마치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대립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
오닌의 난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요시마사는 초기에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 아시카가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요시마사의 부인 히노 도미코가 아들을 출산하자, 히노 도미코는 자신의 아들(후일 아시카가 요시히사)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로 인해 요시마사와 도미코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각각 다른 다이묘들이 이를 지지하며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2. 오닌의 난의 원인
오닌의 난은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했습니다:
- 후계자 문제: 요시마사의 동생 요시미를 지지하는 호소카와 가문과 요시마사의 아들 요시히사를 지지하는 야마나 가문 간의 갈등이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 다이묘 간의 권력 다툼: 지방 다이묘들은 중앙의 권력 투쟁에 편승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 했습니다.
- 막부의 권위 약화: 아시카가 막부는 중앙집권적 통제력을 상실했고, 다이묘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전국적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 경제적·사회적 불안정: 가뭄과 기근, 세금 부담 증가로 인해 농민 반란이 잦았고, 사회적 불안정이 전쟁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3. 오닌의 난의 전개
1467년: 전쟁의 시작
1467년, 호소카와 가문(호소카와 가쓰모토)과 야마나 가문(야마나 소젠)이 각각 요시미와 요시히사를 지지하며 대립하던 중, 양측이 무력을 동원하면서 교토에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교토에서의 격렬한 전투
전쟁 초기에는 교토 시내가 주요 전장이 되었고, 도시는 양측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초토화되었습니다. 양측은 서로 교토를 점령하려 했지만, 치열한 교착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교토 시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교토는 전쟁 기간 동안 폐허가 되었습니다.
전국적 확산
교토에서 시작된 전쟁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를 방어하거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막부는 더 이상 중앙의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전투는 혼란을 더해갔습니다.
전쟁의 장기화
10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명확한 승자가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호소카와와 야마나 양측 모두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점차 전투는 무의미한 파괴로 변질되었습니다.
4. 오닌의 난의 결과
- 교토의 황폐화: 교토는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경제적·문화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 막부의 통제력 상실: 아시카가 막부는 실질적인 통치력을 잃고, 쇼군은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 다이묘들의 독립: 다이묘들은 중앙 권력의 부재를 틈타 자신의 영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시대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 전국시대의 시작: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은 약 100년간 이어지는 전국시대(전국 다이묘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싸우는 혼란기)에 돌입했습니다.

5. 오닌의 난의 의의
오닌의 난은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일본 중세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촉발한 사건이었습니다. 중앙 권력이 붕괴되고 지방 다이묘들이 독립적으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일본은 봉건적 분권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하기 전까지의 혼란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일본 역사에서 "중앙집권의 몰락과 지방 봉건체제의 강화"라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으며, 일본 중세사와 근세사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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