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 막부의 몰락과 일본 전국시대의 시작
앞서 언급하였듯이 무로마치막부의 시작은 남북조의 대립이 치열하였던 1338년의 일이었다.
고다이고천황을 교토에서 몰아냄으로써 건무친정을 종결시킨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1336년 스스로가 옹립한 코우묘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직을 임명받고,
교토에서 새로운 막부를 개창한다. 가마쿠라에 이은 두번째 막부,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개막이다.
원래 토우코쿠 지역을 기반으로 둔 가신이었던 아시카가가 교토에 막부를 세우게 된 이유는
당시 교토가 산업과 유통의 중심이었다는 경제적 이유와 요시노 의 남조를 비롯한
교토 주변의 적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 이유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라는 명칭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교토의 무로마치에 ‘꽃의 궁전’짓고 나라를 다스렸던 데에서 유래한다.
무로마치 막부는 쇼군을 보좌하며 주요정무를 처리하였던 관령직에
아시카가씨와 동족이었던 시바씨, 호소카와씨, 하타케야마씨를 교대로 임명하였고,
지방에는 해당 영지의 모든 지배권을 부여받은 수호대명들이 임명되었다.
무로마치막부의 전성기는 3대 쇼군 요시미츠의 시대였다.
남북조의 통일은 물론, 야마나씨, 오오우치씨 등의 막부에 반하는
유력 다이묘를 토벌하는 등 막부세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1429년 6대 쇼군으로 취임한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적대 다이묘이었던 아카마츠 미츠스케에게 암살당하는가 하면,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대에는 계승을 둘러싼 다툼으로 시작된
응인의 난이 무려 11년간이나 계속되면서 수도 교토가 초토화되고,
전국으로 전란이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이를 틈타 지방에서는 막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치권을 행사하는
이른바 전국 다이묘들이 나타난다.
응인의 난 이후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추방되면서 무로마치막부시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쇼군은 상징적인 존재로서 유력 다이묘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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