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성립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30년) 시기를 통해 고대 세계의 정치와 문화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더불어 고유의 정체성을 점차 잃어갔습니다. 이후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거치며, 이집트는 사실상 독립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상실했습니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외래 왕조의 지배 아래에서 자신의 전통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이 점차 외래 요소와 융합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그리스적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디아도코이(후계자들) 중 하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y I Soter)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집트의 파라오로 선언했으며, 그리스 문화와 이집트 전통을 융합하는 정책을 통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는 이집트가 지중해 세계의 중심지로 부상한 시기였으며, 특히 수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학문과 예술, 경제적 번영의 상징적인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박물관은 고대 세계의 지식과 문화를 집대성한 기관으로, 전 세계에서 학자들과 상인들이 모여드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집트 전통 종교와 문화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파라오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은 아문-라 신앙과 같은 이집트의 고유 종교를 계승하며, 신들과의 연결성을 강조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적 문화와 정치 시스템도 병행되었고, 이로 인해 이집트는 헬레니즘 문화가 크게 융합된 독특한 사회로 발전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헬레니즘 시대 중 가장 잘 기록된 시기 중 하나로, 코이네 그리스어와 이집트어로 쓰인 많은 파피루스와 오스트라카의 발견 덕분에 그 내용이 잘 보존되었다.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당시 이집트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속국으로, 제31왕조로 알려져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멤피스를 방문하고 시와 오아시스의 암문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았으며, 그 신탁은 그를 암문 신의 아들로 선언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인들의 종교를 존중하며 이들의 마음을 얻었지만, 이집트 내 주요 직위는 대부분 마케도니아인으로 임명했고, 새로운 그리스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세웠다. 이를 통해 이집트의 부를 마케도니아 제국의 나머지 정복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331년 초, 알렉산드로스는 군을 이끌고 이제 페니키아로 향할 준비를 마쳤고, 이집트를 떠나면서 클레오메네스를 이집트의 행정책임자로 남겼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이집트에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한 뒤, 그의 장군들 사이에서 계승 문제를 두고 갈등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인 필립 3세와 알렉산드로스의 미성년자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를 대신해 제국의 섭정으로 통치하였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가까운 동료인 프톨레마이오스를 이집트의 사트라프(총독)로 임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323년부터 이집트를 통치하며, 필립 3세와 알렉산드로스 4세를 공동왕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이 분열되면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점차 독자적인 통치자로서 자리잡았다. 그는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이후 다이아도키 전쟁(322–301 BC) 동안 이집트와 그 주변 지역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기원전 305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을 '바실레이오스(왕)'이자 '파라오'로 칭하며 왕조를 시작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구원자)는 이집트를 거의 300년 동안 지배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립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모든 남성 통치자는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공주와 여성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아르시노에', '베레니케' 등의 이름을 선호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의 왕족 간 결혼을 통해 혈통을 강화하는 관습을 채택했다. 이 왕조의 정치 시스템은 점점 더 근친상간적인 양상으로 발전했으며, 후기에 이르러 왕족들은 점차 약화되었다. 공식적으로 독자적인 통치를 한 여성 파라오는 클레오파트라 2세, 베레니케 3세, 베레니케 4세뿐이었다. 클레오파트라 5세는 다른 여성인 베레니케 4세와 공동 통치를 했으며, 클레오파트라 7세는 여러 차례 남성 파라오와 공동 통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으로 이집트를 통치했다.
초기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은 이집트인들의 종교와 전통을 존중하며 이들을 해치지 않았다. 그들은 이집트 신들을 위한 새로운 웅장한 신전을 건설했고, 전통적인 파라오들의 모습을 채택해 이집트인들과의 관계를 원활히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같은 왕들은 이집트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종교와 전통을 인정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수천 명의 마케도니아 퇴역 군인들이 농지를 부여받았고, 마케도니아인들은 이집트 전역에 식민지와 수비대, 마을 등을 세우며 정착했다. 상이집트는 정부 중심지에서 먼 지역으로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 지역의 수도로 그리스 식민지인 프톨레마이스 헤르미우를 세웠다. 그러나 1세기 내에 그리스의 영향력은 이집트 전역에 퍼졌고, 그리스와 이집트의 혼혈 교육 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특권을 가진 소수민족으로 남았다. 그들은 그리스법 아래에서 살며, 그리스 교육을 받았고, 그리스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며, 그리스 도시의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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