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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사

[이집트사]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부흥기

by Timemapcatographer 202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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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부흥기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통치 초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이 분열되면서 벌어진 다이아도키 전쟁의 영향 아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첫 번째 목표로 이집트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그다음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몇 년 만에 그는 리비아, 코엘레-시리아(유대 포함), 키프로스를 장악하였다. 시리아의 안티고노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을 재통합하려 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와 연합하여 그를 저지했다. 312 BC, 그들은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물리쳤다.

 

311 BC, 전투를 벌였던 나라들 간에 평화가 체결되었지만, 309 BC에는 다시 전쟁이 일어났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코린토스와 그리스의 다른 지역들을 점령했다. 그러나 306 BC의 해전에서 키프로스를 잃게 되었다. 안티고노스는 이집트를 침략하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방어했다. 302 BC에는 다시 안티고노스를 물리치기 위한 동맹이 결성되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셀레우코스와의 협정을 어기고 코엘레-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확보했으며, 이는 향후 시리아 전쟁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육상 전쟁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295 BC에는 다시 키프로스를 회복하였다.

이제 왕국의 안정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는 285 BC,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다룬 역사서를 집필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책은 후에 아리안의 작업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283 BC에 8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는 아들에게 안정적이고 잘 통치된 왕국을 물려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는 283 BC,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다. 그는 평화롭고 문화적인 통치를 펼쳤으나, 아버지처럼 뛰어난 전쟁 지도자는 아니었다. 다행히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를 강력하고 번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비교적 안정된 상황에서 통치할 수 있었다. 그는 첫 번째 시리아 전쟁을 통해 동지중해에서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아게아해의 섬들과 칼리키아, 팜필리아, 리키아, 카리아 등 해안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시리아 전쟁이 끝날 무렵 일부 지역을 잃게 되었다. 270년대에는 쿠쉬 왕국을 정복하여 이집트가 쿠쉬 영토와 중요한 금광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는 수단 항구까지 탐험을 확장했다. 또한, 헬레니즘 문화는 이 시기 쿠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학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확장과 과학 연구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시인인 칼리마코스, 테오크리토스, 아폴로니우스, 포시디푸스를 후원했고, 이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시가 작품을 남겼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수학자 유클리드와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쿠스를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이집트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만에토에게 '이집트사'를 집필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첫 번째 아내인 아르시노에 1세와의 결혼을 통해 합법적인 자녀들을 얻었으나, 그 후 그녀와 이혼하고 이집트의 전통을 따라 여동생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이집트인들에게는 기쁨이었지만, 후속 통치자들에게는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알렉산드리아의 궁정은 이 시기에 물질적, 문학적 화려함을 자랑했으며, 칼리마코스와 테오크리토스, 그 외 많은 시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을 찬양하는 작품을 남겼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는 246 BC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는 이전의 왕들과는 달리 마케도니아 후계 왕국들의 전쟁에 개입했으며, 제3차 시리아 전쟁(246–241 BC)을 일으켰다. 그의 동생인 베레니케와 그녀의 아들이 왕위를 둘러싼 정치적 분쟁에서 살해된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바빌로니아까지 진격했고, 해상에서는 아게아해에서 북쪽의 트라키아까지 새로운 정복을 이루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셀레우코스 2세는 왕위를 지켰지만, 이집트의 함대는 아나톨리아와 그리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해안을 지배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더 이상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대신 마케도니아의 적들을 지지했다. 그의 국내 정책은 그의 아버지와 달리 이집트의 전통 종교를 더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는 점차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화 과정을 촉진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학문과 문학 후원을 지속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두 번째 도서관을 건설하고, 모든 책을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수거하여 복사본을 반환하고 원본은 도서관에 보관했다. 또한, 그는 에라토스테네스와 같은 중요한 학자들을 후원했으며, 에라토스테네스는 세계의 둘레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계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이집트 전역에 있는 신전들의 건축을 지원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이었다. 이 신전은 고대 이집트 신전 건축의 걸작으로, 현재까지 가장 잘 보존된 이집트 신전으로 알려져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237 BC 8월 23일에 이 신전 건설을 시작했으며,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통치하던 212 BC에 주 신전이 완공되었고, 전체 복합 건축은 142 BC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 때에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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