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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후예: 하서 위구르

by Timemapcatographer 2022.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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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위구르 제국의 후예: 하서 위구르

 

위구르가 840년 키르기즈에 의해 멸망하면서 위구르의 유랑민 집단은 크게 두가지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남쪽으로 이동한 남주파와 서쪽으로 이동한 서주파로 나뉘어진다.

 

남쪽으로 향했던 남주파는 외게테긴을 다시 카간으로 세우고 험한 고비사막 이남으로 향하였다. 남주파는 고비사막 이남에서 다른 위구르 세력을 규합했다. 당시 남주파의 세력은 어림잡아 인구 100만명에 해당했다. 위구르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당에 식량을 우선 요구했고 수많은 위그드인이 몰려오자 당은 이들의 항복을 요구하며 대치하였다. 당으로서는 칸까지 포함된 정치집단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곧 당은 843년 이들의 본진을 공격하여 위그드인들을 몰살시켰다. 이러한 대치상황과 학살이 7년동안 이어지면서 남주파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세력을 이탈하여 생존을 도모하거나 뿔뿔히 흩어졌고 남주파가 세운 카간마저 살해당하면서 남주파 세력은 와해되었다.

 

하서회랑이 위치한 간수성

서쪽으로 이동한 유랑민들인 서주파는 반면 방테긴이란 인물 휘하에서 이동하였다. 서주파는 15부 10만명 규모로 추산되는데 감주쪽, 지금의 서부회랑으로 서진하면서 총 3갈래로 나뉘었다. 첫째로는 감주와 사주(돈황)를 중심으로 하는 하서회랑 지역에 한 갈래가 들어갔고 텐산 산맥 동부지역의 베쉬발릭과 투르판 부근에 하나의 세력, 그리고 발하쉬 호수 이남의 당시 카를룩 거주지역으로 한 세력이 이동하였다.

 

서쪽으로 이동한 위구르인들 가운데 하서회랑의 감주(장액)에 근거지를 만든 위구르인 세력을 ‘하서 위구르’라고 부른다. 이들이 하서지방으로 내려오기전까지만 해도 이 하서회랑 지역은 티베트(토번)가 강하게 발흥한 지역이었다. 티베트는 8세기 전반부터 하서 지방 및 타림 분지 동부로 세력을 뻗쳤으나 8세기 세력이 약화되면서 하서회랑의 동부는 당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서부의 사주(돈황)에는 한족 출신인 장의조 정권이 들어섰다. 서주파 위구르인들이 티베트에 투항했다고 나오는 중국 측 기록은 위구르인들이 티베트의 영향권이었던 하서지역으로 이주함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

하서 위구르

 

한족 출신 장의조는 9세기 후반 하서 동부의 양주를 점거하고 그 세력을 하서 지방 전역으로 넓혔다. 그때 위구르인들도 이주를 해왔다. 장의조 사후 890년대부터 장의조 정권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나면서 정치적 공백이 생겼고 위구르 인들은 이를 이용하여 에치나 강을 따라 남하하여 감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장씨 정권은 하서지방의 서쪽에 국한되고 그 동부는 감주를 중심으로 위구르 인의 수중에 떨어져 ‘하서 위구르’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중국 간쑤성 일대에 해당하며 하서회랑에 웅거하며 건국하였고 이들을 감주회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서 위구르의 지배자는 중국에서 ‘가한’ 으로 책봉을 받기도 하며 위구르 제국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카간을 칭했다. 이들은 10세기 전반까지도 부족의 명칭을 유지하며 여전히 유목적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감주를 중심으로 동남쪽으로는 산단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북쪽으로 에치나 강을 따라 합려산에 이르기까지 유목민답게 광범위하게 분포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 도시화된 삶을 위해 감주의 성내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하서 위구르는 남주파와는 다르게 하서회랑에서 세력화에 성공했고, 장씨 정권의 뒤를 이어 하서지역에서 권력을 잡은 조씨 정권은 하서 위구르와 병존하며 때로는 긴장관계를 갖지기도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하면서 일대에서 영향력을 미쳤다.

 

하서 위구르가 하서회랑에서 동서 교역로를 확보하고, 영향력을 미치면서 돈황의 귀의군은 위구르를 복속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911년 하서 위구르는 돈황을 공격했고, 복속시켰다. 이렇게 하서 위구르는 독립국가로 발전해 당이 멸망하고 5대 10시대가 열린 이후에도 계속 국가를 유지하며 중국왕조와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하서회랑에서 교역로를 확보하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무역을 주도하며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10세기 요나라가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요에 복속되었다. 이들을 서쪽으로 이주한 요라고하여 서요라고 부르는데 발음은 카라키타이에 가깝다. 또한 11세기 들어 탕구트 출신의 이계천이 송으로부터 독립하여 1002년 영주를 점령하고 1026년 마침내 감주까지 함락했다. 이로써 하서 위구르 왕국의 명맥은 끊어지게 된다. 약 1세기간 명맥을 이어온 하서 위구르는 조씨정권과 비슷한 시기에 무너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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