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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중앙아시아사] - 거란의 등장과 번영, 키타이제국

by Timemapcatographer 202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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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인의 매사냥

당나라의 명운이 쇠해져 가던 10세기 초 시라무렌 강과 랴호허 강 유역에서 살던 유목부족인 거란이 새로이 국가를 건설하였다. 동호와 선비 계열에서 갈라져 나와 4세기 경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했으며 내몽골 지역을 영유하였다. 10세기 초 당시 당은 정권말이여서 내부의 혼란에 몰두하여 국경 외곽 변경에 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고, 거란은 그러한 상황에서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907년 당이 멸망함과 동시에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건국했다.

거란의 최대영역

이들은 농경도 병행하여 반농반목적 생활을 영유하였고, 여진-만주족과는 별개로 더 유목민의 성격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라는 이름보다는 키탄 또는 키타이에 가까운 발음이었던 이 제국은 야율아보기라는 인물에 의해서 세워졌다. 야율은 부족의 명칭 또는 씨족 성으로 쓰였고 아보기는 그의 이름이다. 당시 거란의 수장이었던 카간은 임기가 차면 교대되는 연합체의 수장정도에 불과했었다. 느슨한 형태의 연맹으로 운영되던 거란을 야율아보기는 분권적 지배체제를 무너트리고 독점적 지위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기반에는 야율아보기가 주변 부족들에대한 군사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 있었고 당에서 망명한 한인 및 포로들이 다수 거주하는 한성이라는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를 마시는 거란인 그림

거란의 대내적인 통합을 완료한 아율아보기는 대외원정을 시작한다. 10세기 초 당나라의 멸망과 일어난 중국의 분열은 새롭게 세력을 규합한 거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그리고 924년 몽골 초원으로 진출하여 카라발가순을 거쳐서 하미 북방의 바르쿨 까지 공격하고 나아가 오르도스의 토욕혼과 탕구트도 공격했다. 고비사막 이북을 일컫는 막북의 원정을 마친 아율아보기는 925년부터 926년까지 동쪽의 발해를 공격했다. 해동성국이라 불리우던 발해는거의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고 거란군은 수도 홀한성에 진입하여 발해의 영역에 동단국을 건설하고 거란 카간의 장자를 왕으로 앉혔다.

그러나 성공적인 원정 이후 아율아보기는 귀환중 병사하게된다. 후계자는 차자인 야율덕광이었다. 거란이 요로 국명을 바꾸고, 요의 태종으로 기록된 야율덕광은 후당에서 반란을 일으킨 석경당과 연합하여 중원에서 일어난 후당을 무너트리고 석경당을 황제로 세워 후진을 건설한다. 거란은 후진과의 연합을 대가로 연운 16주를 할양 받고 후진으부터 매년 30만냥의 세폐를 받으며 키타이 제국으로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닦게된다.

거란은 막북과 연운 16주, 서쪽으로 까지 광대한 지역에 걸쳐 통치했다. 서로는 알타이 산맥에, 동으로는 발해만까지였고 북으로는 케룰렌 강에서 남으로는 현재 베이징 남쪽의 백구하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영역을 통치했다. 키타이의 영역에 산재한 도시와 요충지들을 연결하기 위해 역참을 설치했고 이러한 제도는 몽골로 모두 계승되었다. 이들은 키타이 유목민 고유의 부족제는 유지했으나 농경민은 주현으로 편입하여 이중조직을 유지했다. 또한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 대외무역에도 적극적이였다. 남쪽 국경을 맞댄 북송과는 물론이고 투르판, 쿠차, 호탄 등과 사신 교환을 통해 관무역을 계속하였고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에 종사한 위구르인들 역시 거란의 사무역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거란 문자를 만들고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꽃피웠다. 거란의 장식구가 송나라에서 유행하는 등 고도의 문화를 향유하며 지냈으며, 요나라 시대의 불교 유물과 유적은 평이 매우 높다.

거란의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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