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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청동기-철기시대

[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by Timemapcatographer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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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가야 제국(諸國)의 성립과 쇠락

가야는 낙동강 서쪽 지방의 여섯 개의 연맹체로 건국되었다. 낙동강 서안은 작은 분지지형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지형으로 구성되어 커다란 세력이 나타나기 어려웠다. 낙동강의 동쪽은 사로국, 즉 신라가 발흥하고 있었다. 가야의 건국 설화에는 가야 아홉 마을의 우두머리들이 무리를 이끌고 구지봉에 올라가 구지가를 부르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여섯 아이가 태어났고 그들이 자라 가야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야 연맹체의 6가야 수장을 의미하는 존재였다.

가야의 덩이쇠

6가야 중 가장 먼저 국력을 키운 것은 김해의 금관가야였다. 낙동강 유역의 하류 충적평야에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발달한 금관가야는 낙랑군, 왜의 교역의 중간지이자 중심지가 되며 부상했다. 그리고 1세기 무렵에는 특산물인 철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과 교역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가야의 철은 특산품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했으며 덩이쇠 등을 교역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계무역 기지로서 경제력을 쌓아 가야 연맹체의 수장 역할을 하였다. 금관가야가 수장을 맡고있던 시기를 전기 가야연맹이라고 하며, 이후 금관가야가 쇠락하고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5세기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체를 주도하면서 이를 후기 가야연맹이라고 한다. 

 

아라가야가 위치했던 함안의 지형도, 분지지형이 드러난다.

가야는 각가의 소국으로 나누어져 연맹체까지는 통합을 이루어 냈으나 중앙집권을 이루지는 못했다. 고대국가로 발돋움하지 못한 데에는 가야의 지리적 여건이 하나의 이유로 주목된다. 가야의 근거지인 경상도와 전라도 남부 지역은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로 하나의 세력이 다른 세력을 통합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다르는 지역이었다. 분지는 군사적으로 공격은 어려우나 방어는 쉬운 지형이었기에 가야는 압도적인 강국이 나와 중앙집권을 이루기 어려운 지형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국들은 각자가 교역을 통해 경제력을 쌓고 각자의 독립성을 존중하며 연맹체를 유지했다. 이들은 신라 건국 초기에 영토문제로 신라와 계속해서 낙동강을 전선으로 영토다툼을 벌였으나, 신라는 경상도 지역에서 계속해서 중앙집권화를 이루어 왔기에 가야는 신라에게 번번히 패배하며 낙동강 동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에 가야는 서쪽의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신라와 적대적 공생관계, 또는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백제와 신라 두 강국 사이에 끼인 약소국가의 전형적인 대처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의 갑옷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가야를 공격했고, 가야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고구려의 천도와 나제동맹으로 일부 가야는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이때 힘을 잃은 금관가야 대신 연맹체의 수장을 맡은 대가야를 통해 연맹체가 연합하면서 일부 세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의해 복속되자 가야 연맹체의 구성원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아라가야 등 일부 국가는 국제회의인 안라회의를 개최하거나 또는 백제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554년 신라와 백제 사이에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을 때 가야는 백제의 편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가야 역시 백제와 함께 쇠락이라는 운명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견제 속에 소국이 하나씩 멸망하여 결국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흡수당해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가야가 사라지게 된 이유에는 앞서 서술하였던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구심점을 가진 국가가 연맹체 내에서 출현하지 못한 점이 가장 컸다. 이는 분지지형이라는 가야의 지형적 태생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맹체 수준에서 성장이 멈추고, 중앙집권화를 이룬 신라와 백제에게 양분되어 정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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