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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사] - 1938년 이후 소비에트 외교정책과 제 2차 세계대전

by Timemapcatographer 2023.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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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 1938년 이후 소비에트 외교정책과 제 2차 세계대전

 

독일에 대해서 유화책을 펼쳤던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그들은 1차 대전이 일어났던 상황처럼 독일을 억누르는 것은 곧 전쟁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독일에 대해서 유화책을 펼쳤다. 독일도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고,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독일 민족이 거주하는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하려는 히틀러는 이를 이용했다. 

영국의 체임벌린과 프랑스의 달라디에는 뮌헨으로 넘어가서 히틀러 및 무솔리니와 합의했다. 이는 소련을 염두에 둔 행동이라기 보다 전쟁을 극도로 경계한 행동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이러한 서구의 처리방식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다. 소비에트는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서구의 진정성을 의심하게되었다. 소비에트는 체코 슬로바키아를 방어하려고 했지만, 프랑스는 동맹의 무색하게도 도우러 오지 못했고, 소비에트 역시 방관자로 남아있었다. 소비에트가 집단 안보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합병했다.

주데텐란트의 독일로의 귀속 이후 독일 국방군이 주데텐란트에 입성하며 찍힌 사진.

히틀러는 체코의 영토 일부를 합병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동유럽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1939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차지하고 점령지역에는 보호령을 설치했다. 슬로바키아에는 괴뢰국을 세웠다. 이러한 행동은 뮌헨 협정을 파기한 것이며 나치의 팽창주의를 전세계에 보여준 셈이었다. 히틀러는 폴란드로 눈을 돌렸고, 폴란드에게 단치히를 요구했다. 폴란드는 단호히 거부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와 연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유화책이 소용없었음을 깨달았고 폴란드와 연대해 독일과 맞섰다. 

뮌헨조약에서 스탈린의 자리가 없는것에 대한 만평

 

소비에트 역시 전쟁의 포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각국과 합의하기 시작했다. 1939년 봄에 각서 교환을 시작으로 서구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뮌헨협정 이후로 서구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한 소비에트는 8월 23일에 독소 불가침 조약을 모스크바에서 조인하였다. 히틀러는 이 조약을 맺고 후방을 든든히 했다는 믿음이었는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공격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3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 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독소불가침에 대한 만평

볼셰비키와 독일의 나치는 서로를 증오했다. 심지어는 서로를 적으로 보고있었다. 그러나 독소불가침 조약이 맺어지는데 있어서 이러한 사항은 고려되지 않았다. 독일은 팽창을 위해, 제2전선을 만들지 않기 위해 소비에트와 합의를 맺어둘 필요가 있었다. 소비에트 역시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협정을 맺었다. 동시에 이를 활용해서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를 확장했다. 적군은 독소불가침 조약 이후 폴란드 동부를 점령했다. 이곳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와 상호 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이 나라들은 1940년 7월 소비에트 적군에 의회가 포위당한 상태에서 소비에트에 가입하는 의회투표를 해야만했다. 

 

소비에트 적군이 고전한 핀란드와의 겨울전쟁

이런 상황에서 소비에트 북쪽에 위치한 핀란드도 소비에트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았다. 핀란드 정부는 소비에트로부터 국경을 물러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거부했다. 소비에트는 곧장 핀란드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고, 전쟁 초반 고전을 겪었다. 당시 소련군은 총에 맞아 죽은 병사보다 동사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병력의 우위를 이용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핀란드는 영토의 11%와 산업능력의 10%를 소비에트에게 넘겨주었지만 이웃 발트 3국과 달리 흡수되지는 않았다. 또한 소비에트는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 지역을 획득했고, 그곳에 몰다비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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