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주원장4 [중국사] - 명 최초의 반정, 정난의 변과 영락제의 등장 [중국사] - 명 최초의 반정, 정난의 변과 영락제의 등장 홍건적 출신으로 명까지 건국한 주원장은 즉위와 동시에 자신의 장남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다. 나머지 아들들은 변경의 왕으로 임명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주표는 40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이에 주원자은 주표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했다. 주원장 자신이 죽은 뒤 어린 황제에게 숙부들의 핍박이 너무나 당연시 되는 상황이 되었다. 주원장은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수도인 남경으로 오지말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리를 지키라는 유서까지 남기기도 하였다. 자신의 장례를 구실로 아들들이 황태손에게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나머지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행동으로 주원장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신임을 잃었고, 말년에는 고독하게 병사하였다. 71.. 2024. 8. 17. [중국사] - 유목민족의 국가 원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 등장 [중국사] - 유목민족의 국가 원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 등장 쿠빌라이가 대원을 선포하고, 중원을 통치를 시작한지 어언 100년이 흐르자 원나라의 통치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지배계층의 대부분을 이루는 한족과 지배계층인 몽골족의 갈등, 몽골의 통치세력은 라마불교에 심취하여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고, 이는 곧 피지배계층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고 잇따른 자연재해와 기근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여기저기서 반란의 깃발이 일어났다. 중국 하남지방의 백련교 교주인 한산동과 유복통은 이러한 원말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이용하였다. 이들은 백련교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한산동이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으며, 한족 왕조의 정통성을 얻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주모자 한산동은 .. 2024. 8. 16. [중앙아시아사] - 몽골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와 오이라트 [중앙아시아사] - 몽골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와 오이라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 1368년에 몽골인들은 대도와 상도를 명군에게 함락당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중국에서의 영토를 상실하고 초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북원이 건국되었지만 몽골제국은 1487년 다얀 칸이 즉위하여 재통일을 할때까지 120년간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토곤 테무르 칸은 명군이 응창을 기습할때 가까스로 몸을 피해서 측근만을 이끌고 막북 몽골 초원의 카라코룸으로 대피했다. 토곤 테무르 칸을 북원의 1대 칸으로 보기도 한다. 1370년 사망한 토곤 테무르 칸을 이어 아유시리다라 칸은 전열을 가다듬어 명군의 군사적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명나라 홍무제는 1372년 봄 15만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서 출병시켰다. 각.. 2022. 7. 11. [중앙아시아사] - 몽골 제국의 쇠퇴와 종말 [중앙아시아사] - 몽골 제국의 쇠퇴와 종말 세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의 세계지배는 사실상 14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국 붕괴의 조심은 본격적으로 지배체계가 무너지기 20~30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각 울루스에서는 칸의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다이 울루스에서는 1326년 케벡 칸이 사망한 뒤 극히 짧은 기간만을 통치하고 단명한 칸들이 줄을 이었으며 타르마시린 칸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폐위되기도 했다. 내부적인 갈등과 균열로 인해서 차가다이 울루스는 1340년대 후반 동서로 분열되었다. 훌레구 울루스 또한 마지막 군주 아부 사이드의 20년 치세동안 어느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권신들의 세력 균형을 위한 일시적인 안정이지 울루스 칸의 권력이 강해서가.. 2022. 7. 7. 이전 1 다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