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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사

[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by Timemapcatographer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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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 강화도 조약과 개항, 불평등조약의 시작

고종과 명성왕후

1873년 서양과 통상을 반대하면서 척화비까지 세우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조선의 정권은 고종이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완전하게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고 왕비의 인척인 민씨 일가가 정국을 주도하는 형식이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부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세력은 척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결국은 외국에 통상요구에 조선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에 관심을 돌렸다. 

강화도 조약

척화에 목숨걸던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자 조선보다 훨씬 앞서서 개항한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개항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조선에 자국 군함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일본에서 출발한 운요호는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로를 측량하고 강화도 초지진에서 함포사격을 하는 등 조선 수비군을 자극하여 전투를 일으켰다. 결국 이 전투를 구실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며, 조선에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다. 조선의 일부 관료도 이 기회에 통상을 하자고 주장하여 결국 조선은 일본의 통상요구에 굴복해 조일수호조규를 1876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이 강화도에서 체결되었다고하여 강화도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운요호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문제가 많은 조약이기도 했다. 당시 위정자들은 근대적인 조약에 대한 개념과 관세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수호조약과 뒤이어 체결된 조약 부록과 통상장정에는 관세와 항세에 대한 조항이 전혀 없었다. 이는 일본시장의 물건과 자본이 조선을 잠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일본인 거류지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일본 화폐가 자유롭게 유통되기도 했다. 심지어 쌀을 비롯한 조선의 식량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을수 있는 조약도 넣지 않았다.  이는 근대적 조약체결이 처음인 조선에게 있어 일본이 불평등 조약을 맺게 한것이다. 물론 악소조항의 폐혜를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무력으로 조선을 회담장에 앉힌 일본이 양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행태는 자신이 열강들에게 당했던 일과 같으며 이를 조선에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일본과 처음 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청의 권유에 1882년에는 미국과 조약을 맺었다. 미국과의 조약도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다. 대표적 악소조항으로는 최혜국 약관이 있었고, 미국 역시도 치외법권까지 가져졌다. 뒤이어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들과 조약을 맺었으나 이들과의 조약에서도 불평등한 조건은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 

 

세계열강의 관심이 조선에 쏠린 상황에서 조선내 이권에 관심을 보인 나라는 청이다. 청은 세계무대에서 종이 호랑이 임을 이미 들킨 상황에서 자신들의 속국으로 여기는 조선마저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조선에 대한 내정에 간섭했다. 1882년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청의 상인은 조선의 내륙까지 들어올 수 있었으므로 청의 경제 침투가 강화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은 조선이 자신의 속국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이 조약의 결과로 청과 조선의 무역량은 점점 늘어나 종전의 일본이 가지고 있던 점유율을 가지고 왔다. 조선은 일본과 청의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었으며 이러한 청의 행보에 일본 역시 불만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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