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 조선 후기 사회와 동학농민운동, 동학과 전봉준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국가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세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다. 세금을 걷는게 아닌 수탈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삼정의 문란, 황구징수 등이 남발되었고, 어지러운 조세제도는 대원군 집권 이후, 개항을 한 이후에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부패한 관리와 아전들의 수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편 조선이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개항을 시작한 이후, 조선 사회 곳곳으로 들어와 활동하던 청과 일본의 상인들은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한 원인이었다. 조청수륙무역장정 이후 청 상인들은 내륙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고, 청에서 생산된 물건을 조선에 들여왔다. 조선에서 이와 관련된 산업을 하던 수공업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거기에 일본은 당시 산업화, 근대화의 수순을 걷고있었는데, 노동자들의 안정을 위해 대규모의 쌀이 필요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데 열을 올려 조선 각 지방에서 방곡령을 내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곡령은 일본 정부의 항의로 무산되었다. 일본 상인들은 쌀이 수확되기도 전에 미리 사들였고, 조선의 쌀은 헐값에 팔려 일본으로 넘어갔다. 조선에서는 추수를 한 다음에 오히려 곡물이 부족해 쌀값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던 중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동학이 삶이 어려웠던 농민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는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더 극심했다. 관리와 아전 뿐 아니라 왕실도 농민에게서 지대를 거두었는데, 그중에서도 고부는 전라도 중에서도 땅이 기름지고 너른 평야가 있어 자주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이곳에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갖가지 명분으로 세금을 징수하면서 농민을 수탈하였는데, 특히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축조하여 여기에 사용료를 부과했다. 각종 조세와 잡세를 참다못한 전봉준과 전라도 고부 군민은 1894년 음력 1월 10일 관아를 점령하고 아전을 벌하고, 군수인 조병갑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물론 고부 농민들의 피눈물이 고여있는 만석보는 파괴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쳤다.
고부에서 일어난 사태를 알게된 조선 정부는 우선 군수를 교체하였다. 신임 군수 박원명이 내려와 고부 사람들을 달래서 봉기군을 해산시켰고, 이로 인해 사태는 일단 진정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의 주동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체포하고 처형하자, 이에 농민들은 매우 분노하며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농민들은 탐관오리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 사회적 차별 철폐 등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는 동학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근대적 이념으로 나아가는 농민들의 사회적 변혁 요구였다. 이때 일어난 농민군의 봉기를 1차 봉기라고 한다.
이에 조선정부는 반상의 제도를 뒤흔드는 사회적 요구로 받아들이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관군을 동원하였다. 홍계훈을 필두로 하여 800여명의 경군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등지에서 수비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나아가 전라도 감영이 있던 전주까지 점령하였다. 급박해진 조선은 청군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텐진조약의 조약을 빌미로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을 사이에 두고 양 강대국이 농민 봉기 진압을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동학농민군과 조선 정부는 급히 전주화약을 맺었다.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신들이 주장한 개혁에 대하여 실천적으로 행동하였다. 한편 전라도의 사례를 통해 경상, 충청, 경기 등 다른지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농민군과 정부는 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자 이들을 철수하게끔 하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은 것이었다. 그러나 청과 일본의 군대는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반도 내에서의 영향력 다툼을 위해 둘만의 전쟁을 벌였다. 이를 청일전쟁이라고한다. 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곳은 한반도였기 때문에 조선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받아야만 했다. 1894년 벌어진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조선에 들어온 청 군대는 북양대신의 군대 일부였을 뿐이지만, 일본은 국운을 걸고 가용가능한 군대를 모두 조선에 투입하였다.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하였다. 승리를 통해서 일본은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조선 정부에 대해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이에 농민군은 외세를 물리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면서 다시 봉기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 동학의 연합군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였다. 서울로 진격하던 중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조선 관군이 연합한 군대와 맞서게 되었다. 유럽에서 수입한 근대식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서 농민군은 화력에서 밀려 패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청주를 공격하던 동학농민군의 다른 부대도 패퇴함으로써 농민 봉기는 수포로 돌아갔다. 전봉준, 김개남을 비롯한 주요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 역시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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