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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근-현대사

[현대사] -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의 하야: 현대사의 시작 /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

by Timemapcatographer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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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의 하야: 현대사의 시작 / 대한민국 민주화의 시작

 

사사오입개헌 사건과 이를통해 3선연임이 가능해진 이승만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10년,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이 10년간 집권하였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한국전쟁, 사사오입 개헌 등을 거치면서 권력을 독점화하려 했고, 1956년 3차 연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70세가 넘은 나이였다. 3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웠다.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장면 부통령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조병옥이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단독후보로 당선이 정해졌고, 세간의 관심은 부통령 선거에 집중되었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패한적 있는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여러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거를 조작하려 하였다. 당시 이승만이 70대 중반을 넘어가는 상황에서 나이가 많아 갑작스럽게 서거한다면 이를 이어 국가를 책임져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부통령 자리는 결국에는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을 수 도 있는 중요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야당이 선거유세를 펼칠 때마다 공권력을 동원한 조직적인 방해를 시행했다.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야당 유세장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요일에 등교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투표 당일에는 비밀선거의 원칙을 무시한채 3인조 공개투표, 9인조 공개투표, 자유당 완장을 찬 인원의 투표자 위협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어 투표에 영향력을 끼쳤다. 이는 헌법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시민들의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이기붕은 제 4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부정선거 당시의 모습과 이에 대항한 시민들의 시위

이러한 자유당의 부정선거는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투표일 이전에도 일요일에도 등교해야 했던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대구에서 일어났으며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시위를 진압하면서 시민을 대상으로 발포했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당시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한달 뒤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시민혁명의 불길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산시위 당시 경찰은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의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바다에 몰래 버렸던 것이다. 분노한 마산 시민과 학생은 거리로 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성난 시민들의 시위는 오히려 서울을 비롯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과 교수단의 시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며 시위를 벌였고,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공격당하면서 부상자가 생겼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음날에는 학생은 물론 교수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다음날인 4월 19일에는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과 일반시민까지 시위에 가담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들은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은 물론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군대를 동원하고 시위대에게 발포하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시위대는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국민의 분노는 더 커질 뿐이었다. 시민을 향해 발포하던 계엄군조차 시위대에 동조하고, 심지어 서울 시내의 대학교수단도 학생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4월 19일의 시위행렬은 전국을 뒤덮었고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4.19 혁명시위의 열기가 반미 분위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미국은 이승만에게서 등을 돌렸고, 비공식적으로 이승만의 지지를 철회하였다. 미국이라는 배후를 잃은 이승만은 결국 대국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자신은 아내 프란체스카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부정선거의 한 축이었던 이기붕은 아들 이강석에 의해 일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이들을 총으로 쏜 이강석도 자살했다. 이윽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개헌이 이루어져 대한민국은 내각책임제로 개편되었다. 민주당은 뒤이은 선거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새로운 국무총리에는 장면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역시도 4월 혁명의 이념을 모두 소화해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세력의 5.16군사 쿠테타가 발생하면서 4월 혁명이념은 완성되지 못하였고 직접적인 실천은 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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