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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영국사

[영국사] - 청교도 혁명과 올리버 크롬웰, 영국의 왕정복고

by Timemapcatographer 2023.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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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 청교도 혁명과 올리버 크롬웰, 영국의 왕정복고

찰스 1세와 올리버 크롬웰

의회와 국왕 찰스가 각각 군대를 조직하면서 영국은 내전에 휩싸인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 한다. 내란이 시작되었을 무렵 전세는 왕당파인 기사당에 유리했다. 의회파의 군대는 지방유력인사들의 병력을 끌어모은 형식이었기에 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1644년 마스턴 무어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원두당의 크롬웰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올리버 크롬웰은 철기군을 조직하여 내전 초반에 왕당파에 밀리던 상황을 역전시켰으며, 신형군(New model army)를 조직하여 네이즈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온다. 크롬웰의 잇따른 승전보로 그는 의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게되었다. 왕당파는 이후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1년 뒤에 의회파에 항복한다. 의회에서는 크롬웰의 영향으로 급진파가 권력을 잡게된다. 

던바에서 철기군을 이끄는 크롬웰

네이즈비 전투에 패배한 국왕 찰스는 스코틀랜드로 쫓겨갔다. 스코틀랜드에 잔류한 찰스는 이곳에서 복위를 준비한다. 1648년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하며 찰스의 복위를 주장하였으나 크롬웰은 병력 8천여명을 이끌고 프레스턴 전투에서 이들을 막아냈다. 스코틀랜드의 남진은 막혔고, 결국 스코틀랜드는 일부 보상금을 받고 찰스를 크롬웰에게 내어주었다.

찰스 1세의 처형

의회파에게 감금당한 채 있던 찰스 1세는 외부와 연락하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는데, 의회파 내부에서 수평파와 독립파가 충돌하는 사이 왕당파가 2차 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왕당파 병력은 1년만에 다시 프레스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진압당했고, 찰스는 다시 포로가 되었다.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처형을 건의했으나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이에 크롬웰은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습격했고, 왕을 재판할 최고 법원을 열어 찰스 1세를 처형했다. 

 

국왕의 처형으로 영국은 공화국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의 왕정 복고 시도가 있었긴 했지만, 크롬웰과 의회파는 이를 잘 진압했다. 그러나 의회 또한 대부분이 감금되거나 숙청되어 크롬웰이 남긴 잔부의회만이 명목상 존재했고, 모든 실권은 크롬웰과 그의 군대에게 있었다. 크롬웰은 잔부의회마저 해산하고 스스로 호국경의 자리에 올라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호국경의 정치는 군대를 위시한 정치였으므로 소장제와 같은 정책들은 국민적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호국경의 정치는 실패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서 열린 찰스 2세의 대관식

1658년 크롬웰 사후 그의 후계자로 아들인 리처드가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으나, 영국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호국경의 정치를 원하지 않았고, 군 사령관 몽크 장군은 잔부의회를 재소집하여 처형당한 찰스 1세의 장남을 다시 국왕으로 복고 시켰다. 1660년 찰스 2세는 국민의 환호 속에 귀국하여 영국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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