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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프랑스사

[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인권선언과 봉건제 폐지, 루이 16세와 10월 폭동

by Timemapcatographer 2023.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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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 국민의회의 인권선언과 봉건제 폐지, 루이 16세와 10월 폭동

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이후 프랑스 전역은 혁명의 불꽃에 휩싸였다. 지방의 도시들은 파리의 상황을 모방하여 기존의 행정기구를 타파하고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자치위원회와 민병대를 조직했다. 농촌 곳곳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여 혼란이 진정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귀족들이 혁명을 저지하려한다는 소문, 외국 군대와 비적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을 믿기 시작했고, 이들 사이에서는 공포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농민들은 대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호미와 갈퀴같은 무기로 쓸만한 자위책을 강구하였다. 이들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귀족의 성과 영주의 저택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봉건적 권리가 쓰인 문서를 불살라버렸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폭동 소식에 파리의 국민의회는 당황했다. 국민의회의 시민 대표중에는 봉건적 권리를 소유한 이들이 있었고, 보다 급진적인 상황에 재산권이 위협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농민의 지지 없이 혁명을 지속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였다. 국민의회는 결국 봉건제를 폐지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폐지된 것은 명예적 특권에 불과했고, 봉건적 공납은 유상폐지를 채택하여 재산권을 보호하였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국민의회는 전국에서 일어나는 혁명적 봉기로 인해 상황이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하며 혁명의 원리와 이념을 천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채택되었다. 인권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그렇게 존속한다" 라고 선언하였다. 

 

인권선언은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를 자유라 칭했으며 자유의 한계는 오로지 법으로만 정한다고 하였다. 또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총 17개조로 구성된 인권선언은 사실상 구제도의 사망선고, 앙시앵 레짐의 타파를 의미했다. 나아가 봉건제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로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프랑스 국와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트와네트

그러나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이러한 혁명의 진정을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국왕과 일부 국왕파 계층은 혁명에 대해 인권선언을 거부하는 등 소극적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을 주도한 애국파에 분열이 생기고, 농촌지역에서 일어난 대공포에 의한 혼란으로 파리 도심으로의 식량공급이 어려워졌다. 결국 1789년 10월 파리의 하층계급 부녀자 7,000여명이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하며 루이 16세의 귀환을 요구하였다. 베르사유의 경비병들은 이들의 시위를 막지 못했으며 시위대 일부는 궁궐에 난입하여 왕비를 죽이려고 하기도 하였다. 

베르사이유 여성 행진, 10월 폭동 (1789년 10월 5일)

그러나 루이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파리로의 귀환을 약속하며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루이는 시위대에 둘러싸인채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이동하였다. 이 10월 폭동은 시위대의 과격함이 드러난 사태로 왕실이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국왕은 파리시민의 감시 하에, 국민의회는 파리 시민의 보호아래에서 활동할수 있게 되었다. 무력을 가진 경비병이나 귀족들 역시 시위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혁명 당시의 시대상과 분위기를 보여준다. 10월 폭동을 끝으로 1789년의 혁명은 우선 마무리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의 혼돈이 더 오랜시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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