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사] -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 앙시앵레짐의 붕괴와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프랑스 대혁명의 깊은 원인은 구체제의 모순인 앙시앵 레짐이다. 그러나 혁명을 촉발시킨 트리거는 프랑스의 경제적 위기였다. 절대왕권을 자랑하던 루이 14세 말년 때부터 프랑스는 위그노 탄압등으로 국내외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며 재정적 어려움에 허덕였으며, 루이 15세를 거쳐 루이 16세에는 결국 귀족의 면세특권을 없애려고까지 하였다. 결국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지만 그만큼 프랑스의 재정상태는 엉망이었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참전했던 미국 독립전쟁은 결국 프랑스 국가재정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루이 16세의 재무장관 칼 론느는 근본적 해결책은 앙시앵레짐에 기반한 면세특권임을 간파하고 보조지세의 부과를 위한 개혁을 준비했다. 그러나 귀족계급으로 구성된 명사회는 귀족의 면세특권을 빼앗는 보조지세 개혁에 반대하고, 삼부회를 거쳐 세금을 신설할 것을 요구했다. 귀족들의 속내는 영국처럼 절대왕권을 제약하고 귀족정치를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파산 위기에 직면한 루이 16세는 사실상의 포기 상태로 삼부회 소집을 선포했다.
루이 16세가 선포한 삼부회의 소집명령에 전국의 모든 제 3계급은 희망에 부풀었다. 18세기에 들어 치솟는 물가 대비 임금의 상승은 매우 적었기에 도시 민중은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여기에 영불통상협정의 체결로 인한 영국의 값싼 공업제품의 수입은 프랑스의 공업적 기반을 흔드는 요인중에 하나였다. 수많은 시민과 농민은 경제적 어려움이 겹친 상황에서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3계급의 요구가 삼부회에 관철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삼부회의 간접선거 방식은 신분별 투표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고 이는 제 3신분에게 매우 불리했다. 제 3신분의 대표자들은 3신분 대표자의 수를 늘려줄 것과 머리수 표결을 요구했다. 루이는 신분대표의 수를 늘리는 것은 동의했으나 표결방식은 바꾸지 않았다. 표결방식에 대한 입장차이는 결국 혁명의 방아쇠가 되었다.
1789년 5월 베르사유에서 제 3신분 대표들이 머리수 표결을 요구하며 신분별 회의를 지양하며 국민의회를 선포했다. 그리고 1신분인 성직자와 2신분인 귀족에게 합류를 요구했다. 이들은 대부분 국민의회에 합류를 거부했으나 일부 말단 성직자가 이 요구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회의 장소를 빼앗기자 테니스 코트에서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요구 관철 이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며 서약했다. 이를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라고 한다. 루이 16세도 어쩔수 없이 1, 2계급의 국민의회 참여를 지시했다. 이렇게 국민의회가 형성되며 구시대의 모순인 앙시앵레짐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왕과 귀족이 새로운 질서에 대해 순응하거나 협력한 것은 아니다. 국왕은 군대를 결집시켜 베르사유에 주둔시켰고, 이에 대항해 평민대표와 선거인단은 민병대를 조직하며 버텼다. 그러나 이들은 무장되지 않은 민간인에 불과했으므로 무기와 탄약이 저장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점령한 뒤 무장하였다. 이때 대규모의 민중이 참여하여 민병대의 편에서 싸웠다. 바스티유 감옥은 정치범이 수감되던 곳으로 민중에게는 압제와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에 저장된 탄약과 무기는 비록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의미만큼은 상징적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혁명에 민중이 참여하기 시작한 신호탄이며 폭력과 압제에 대한 민중의 첫 승리를 나타낸다. 프랑스 전역은 이제 혁명의 불꽃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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