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사] - 동호의 후예, 유목민족 선비족
본디 선비는 동호에 속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흉노족 묵특선우에게 공격을 받고 동호는 두 갈래로 나뉘어 이주하였는데 이 두갈래가 오환과 선비로 나누어졌다. 눈강 상류의 산악지역으로 들어간 동호는 선비족이 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발음의 음가값이 [세르비 : Servi]에 가까웠기에 기록에 선비로 옮겨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1세기 중반 선비는 오환이 한나라의 영향권 아래의 지역으로 이주하자 오환 거주하던 초원지대를 자신들이 채우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동으로는 내몽골에서부터 서로는 주천과 동황에 이르기는 넓은 영역을 관할하였다. 이는 곧 선비족이 중국 북변에 넓게 분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비족은 기본적으로는 후한의 울타리로서 오환 편에 서서 북흉노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군사징발에 응해 타 민족이나 흉노를 공격했다. 87년에 있었던 흉노공격에서는 선우를 비롯해 흉노족 10만여명을 참살한 일도 있었는데, 이때의 사건을 계기로 선비족은 흉노를 대신아 새로운 몽골초원의 패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선비족이 흉노를 대신해 몽골초원의 패권을 물려받은 사실은 한나라에게 있어 좋지않은 일이었다. 한나라는 흉노를 조공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했지만 흉노는 조공체제를 이용하여 한나라에게서 막대한 제물을 갈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흉노가 패권을 잃고 선비에 복속되자, 선비는 흉노보다 더 잔혹하게 한나라의 재원을 탐하였다. 게다가 선비의 활동영역은 흉노보다 훨씬 넓어서 동쪽의 요동과 요서 뿐 아니라 서쪽의 대군, 오원, 삭방 등에서도 선비족에 의한 약탈이 심각했다. 심지어 현재의 산서성 북부까지도 선비의 활동영역이었다. 선비는 오환과 흉노세력의 흡수, 나아가 한나라 약탈로 인한 경제적은 부흥으로 인하여 '대인'이라고 불리는 정치적 대표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훌륭한 군사지도자이자 지도자였다.
150~180년대에 활동하던 단석괴라는 선비의 수령은 선비 전체를 동부, 중부, 서부로 나누어 한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약탈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단석괴 사후에는 가비능이 이 직책을 맡아 약탈 지도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선비는 흉노와 같이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 국가가 아닌 개인의 무력 또는 지도력에 기댄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선비는 시스템의 부재로 통합을 이루어 제국으로 나아가는데에는 실패하였다. 일각에서는 당시의 선비족을 선비제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제국으로 나아가지는 못한 것으로 본다. 당시 6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선비족은 후한이 멸망하자 삼국이 정립하는 혼돈스러운 시기에 중국 북부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선비 출신 가문들이 사마씨의 진나라 이후 펼쳐진 5호 16국 시대에 국가를 세우며 다시 한번 활약한다. 선비족 탁발부가 북위를 세웠으며 439년에는 화북을 통일하기도 했다. 수나라 양견 역시도 선비족 우문부가 세운 북주의 외척인 선비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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