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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사] -중국 민주화 요구의 물결과 천안문

by Timemapcatographer 202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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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중국 민주화 요구의 물결과 천안문

 

모든 권력은 인민의 것이다.

 

인민은 잊지 않는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1989년 6월 4일, 넓은 광장에 수많은 시민이 모여 자유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수많은 전차가 밀려들어 이 학생과 시민들을 밀어버립니다.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요.

 

문화대혁명의 실패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하며 세계에 중국의 문호를 열고 경제 교류를 시행합니다. 이로인해 지식인과 대중을 중심으로 서구세계와의 접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이들의 열망 또한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중 1989년 4월, 중국 공산당에서 민주화의 상징격인 인물인 후야오방이 사망하면서, 그를 추모하는 인원들이 베이징 천안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죠. 후야오방의 죽음에 수많은 중국 대학생들은 화환을 바치며 천안문 앞 광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후야오방을 추모하며 당에서 그를 재평가해주길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대의 움직임은 곧 민주화 요구시위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위에 각계 각층의 시민이 참여하고 전국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광장에는 어느새 100만이 넘는 인파가 몰리게 된것이죠. 

 

중국 공산당은 결국 5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중국 인민군 약 5만명이 베이징에 투입됩니다. 공수부대와 기갑주대가 투입되었고, 군용 헬기까지 동원되어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위대의 완강한 저항과 계엄군에 대한 설득으로 결국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합니다. 

 

별다른 유혈사태가 없었던 5월과 달리 6월에 들어서면서 기류가 바뀌게 됩니다. 공산당의 강경파들은 해산을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지방의 산발적인 시위들은 대부분 진압되었으며 베이징에서의 시위도 약해지고 있었죠. 6월 2일 공산당의 덩샤오핑과 리펑은 천안문 광장을 “정리”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공산당 수뇌부의 명령에 따라서 6월 3일부터 진입하기 시작한 계엄군에 시위대는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였으나, 결국 계엄군은 유혈진압으로 천안문에서 시위대를 밀어냈습니다. 경보병 부대의 진입은 물론이고 기갑부대가 함께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죠. 인민을 위한 군대가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셈입니다. 

 

계엄군은 시위대에게 전차와 총기를 동원하여 무차별로 발포했습니다. 군인들이 먼저 진입했고, 발포하여 시위대를 흩어놓은 다음 전차와 장갑차가 진입했습니다. 장갑차의 군인들은 시민을 향해 발포했고, 전차는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깔아뭉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위대가 아닌 시민들도 이런 경악스런 광경에 돌을 던지며 계엄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택시와 버스 등을 동원해서 전차의 진입을 막고, 화염병을 던져 장갑차 내부의 승무원을 끌어내기도 했죠. 그러나 이러한 작은 저항 역시 결국에는 진압되었습니다. 계엄군은 광장의 불을 모두 끈 채로 시위 지도층에게 해산하라며 종용했다. 해산하지 않으면 시민과 시위대를 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전차는 사람이 가득 찬 광장을 향해 달렸고, 그날 밤 계엄군은 해산하지 않은 시위대 모두를 “정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중국의 마지막 양심이자, 중국 민주화 운동의 불꽃은 수많은 죽음과 함께 사그러집니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이후 서구와 일본 등의 경제적 선진국들과 교류하며 경제적 성장을 꾀하던 중국 공산당에게 이 사건은 매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국제사회의 비난과 질타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미국은 대중 무기수출 금지와 첨단기술의 수출을 엄격히 금지했고, 유럽권에서는 프랑스가 중국에 대해 제제를 시작했습니다. 세계은행은 혹독할 정도로 강한 제제를 가했는데, 7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유보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중국 공산당에서는 먼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우호전략을 내세우며 난관을 타개하려 했죠. 1992년에는 한중수교를 맺었으며 조금씩 천안문의 기억을 잊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를 외쳤던 유일한 중국의 양심은 그렇게 폭력 아래 사그러졌고, 중국은  일당 독재, 사회주의 체제를 계속 이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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