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공화국과 사다트


안와르 사다트는 1970년 10월 15일,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의 사망 후 이집트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다트는 초기에는 나세르의 정치적 유산을 따르며 나세르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보였으나,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많은 정책을 변경하며 나세르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인피타'(Infitah) 정책을 통해 나세르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포기하고, 외교적으로는 소련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종료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또한, 이스라엘과의 평화 과정을 시작하여 시나이 반도의 이스라엘 군과 정착민들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평화 노력으로 이집트는 아랍연맹에서 제명되었고, 국내적으로는 평화 조약에 대한 반대가 거셌다.
사다트의 초기 대통령직은 '수정 혁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1971년 5월, 정부의 전면적인 정리를 통해 나세르주의자들을 제거하고,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일부 허용하였다. 또한, 1967년 6일 전쟁 이후 시작된 이집트의 '소모전'을 이어가며,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초기에는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1973년 10월, 사다트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개시했고, 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초기 승리로 시작되었으나,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전쟁은 결국 휴전으로 마무리되었고,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전쟁은 이집트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며, 사다트는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을 이끌어내었고, 1979년에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사다트는 이 평화 협정으로 큰 외교적 성과를 이루었지만, 이로 인해 국내외에서 큰 반대와 비난을 받았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과 아랍 국가들의 비판을 받으며, 결국 사다트는 1981년에 그에 대한 불만으로 암살시도가 있었다. 10월 6일 열병식때 이슬람주의 과격파 소속 군인들은 수류탄과 사격으로 사다트를 저격했으며, 격렬한 총격전 끝에 사다트는 목숨을 잃었다. 사다트의 리더십은 이집트와 아랍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하며, 평화와 협상, 그리고 개혁의 복잡한 역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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